[김상천의 엔딩크레딧] 마지막.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의 해피엔드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마지막.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의 해피엔드
  • 김상천
  • 승인 2014.01.07 02:06
  • 호수 13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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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신문은 참 묘한 게요, 꼭 새해를 시작하는 신년호에 작별인사를 하게끔 발행일정을 짭니다. 단대신문만의 병적인 유머라고나 할까요. 백색볼펜 연재할 때는 그게 싫어서 제 맘대로 연말에 굿바이 해버리고 신년호 원고는 차기 편집장한테 쓰라고 했어요. 좋잖아요, 연말에 마무리하면 완결감도 들고. 새 필자 입장에서도 신년호부터 시작하는 편이 산뜻하고. 근데 끝내 이렇게 새해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순간이 오고 말았네요. 어휴, 졌다 진짜.

▲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연재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은 꼭 이 영화를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는 제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해피엔딩의 영화입니다. 더없이 해피해피하고, 모두가 한껏 취한 축제 같은 영화입니다. 눈은 도무지 지루할 틈 없이 신비로운 영상에 매혹되고, 귀는 일어나서 춤추고 싶게끔 들썩이는 음악에 홀리는, 그리고 마침내 삶은 희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영화입니다. 몇 번을 봐도 다시 보고 싶은 완벽한 해피엔딩입니다.

음, 그런데요, 실은 오늘은 줄거리 등의 영화소개를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말을 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말의 해엔 말 같은 말만 해야죠. 영화를 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이 칼럼을 연재하며 별 희안한 시도들을 다 해봤는데, 급기야 마지막엔 ‘영화소개 안 하는 영화칼럼’을 쓰고 있네요. 그냥 도란도란 수다나 떨어도 괜찮죠? 마지막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소서.

누구나 저마다의 ‘내 인생의 영화’가 있잖아요. 그게 저에겐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들입니다. 채널을 돌리다 EBS에서 본 <집시의 시간>은, 그 LPG가스통으로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한 충격은 저를 지금의 저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 상징이나 숨은 의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충격은 강렬했습니다. 가슴이 벅차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냥 밖에 나가 걸었습니다. 4시간 넘게 목적지도 없이 걷는 동안 머릿속엔 ‘뭐지 이건 대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그렇게 영화에 홀렸습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는 다시 또 제 인생의 방향을 정해줬습니다. 언젠가 이 영화의 결혼식 시퀀스를 보면서 처음으로 소설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인데도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부끄럽지만 그게 제 꿈입니다. 언젠가는 제가 죽고 난 뒤에도 독자가 책장을 덮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만한 소설 한 권을 쓰는 것. 지금은 형편없지만 한 20년쯤 꾸준히 쓰다보면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집시의 시간>.

▲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의 결혼식 장면.
▲ "핏불, 테리어"라는 첫 대사 그 자체인 다단. 전 이 케릭터 춤 추는 게 너무 좋아요. ㅋㅋㅋ
▲ 록 밴드인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에밀 쿠스트리차. 아무튼 재밌는 형입니다. 2008년엔 내한공연도 왔었죠. 크라잉넛이 관람하러 간 걸 보고 '아, 역시' 했습니다.

사실은, 그냥 정보 없이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영화를 봤을 때가 수십 배 더 강렬했거든요. 발칸반도의 총성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니, 이런저런 정보를 알고 나서 대단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쩐지 영화의 환상이 사라져 쓸쓸하더라구요. 이해되지 않는 건 그냥 그대로 두고 상상하며 봤을 때가 훨씬 좋았어요. 그때야말로 이 영화가 온전히 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배경지식과 해석이 없어도 얼마든지 영화 관람은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영화는 수학문제가 아니잖아요. 어떤 영화들은 검색창을 여는 순간 울림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다죠. 이 영화와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검건 희건 똑같은 고양이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든 피아노 건반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 맞건 노란색이 맞건 언젠가는 화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나리 진달래처럼 피어나는 때가 빨라서 나쁜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HAPPY END-

제작: 김상천
연출·각본: 김상천
음악: DJ칙
투자·배급: 단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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