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4 ·19 革命의 그 날을 맞는다
또 4 ·19 革命의 그 날을 맞는다
  • 권용우
  • 승인 2014.04.0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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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4 ·19革命의 그 날을 맞는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6일, 지인과 함께 국립 4 ․ 19묘지를 찾았다. 4 ․ 19 학생혁명이 일어난 4월 19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문득 54년 전의 그 때를 떠올리면서 묘역과 혁명기념관을 둘러보았다.

 

‘守護禮讚의 碑’ 앞에 서다

 

먼저 ‘역사의 증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墓域)을 찾아 참배를 했다. 이 묘역에는 젊은 혼(魂)들이 거룩한 수호신(守護神)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한수(李漢洙) ․ 박동훈(朴東薰) ․ 김치호(金致浩) ․ 안승준(安承駿) ․ 고순자(高順子) …. 참으로 거룩한 이름들이다.

묘역 바로 앞에는 잔디로 잘 다듬어진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좌우 양편에는 ‘수호예찬(守護禮讚)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 4 ․ 19 학생혁명을 소재로 한 12편의 시(詩)가 새겨져 있었다. 시 한 편 한 편을 읽고,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문득 조지훈(趙芝薰)의 ‘진혼가’(鎭魂歌)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에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강산을 흔들었다.

선혈(鮮血)을 뿌리며 우리 싸워 이긴 것

아! 민주혁명의 깃발이 여기 있다.

가시밭을 헤쳐서 우리 세운 제단(祭壇) 앞에

울며 바친 희생들아 거룩한 이름아!

고이 잠들거라.

조국의 품에 안겨

역사를 지켜보는

젊음의 혼(魂)은 살아있다.”

 

이 뿐이 아니었다. ‘4월 학생혁명기념탑’에 새겨진 짧은 글귀도 필자의 마음을 뭉쿨하게 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獨裁者의 末路를 되새겨보다

 

4 ․ 19 학생혁명! 이는 이승만(李承晩) 자유당(自由黨) 정권의 권력욕이 부른 당연한 결과였다.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건국과 함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6 ․ 25 전쟁을 거치면서 권력의 강화를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임시수도(臨時首都) 부산(釜山)에서의 일이다. 대통령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국회(國會)의 간접선거(間接選擧)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헌법(憲法)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그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이 1952년 7월 4일의 「발췌개헌」(拔萃改憲)이다. 우리 헌법사(憲法史)에 있어서 최초의 개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를 골자로 한 국회의 개헌안과 정 ․ 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한 정부의 개헌안을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개헌안은 심야국회에서 거수투표에 의하여 변칙적으로 가결된 역사의 오점(汚點)으로 남아 있다.

1954년 11월 27일의 제2차 개헌은 「4사5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가 그 골자로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개헌안에 대한 국회의 표결결과는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7표로서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부족하여 부결(否決)이 선포되었으나, 그로부터 이틀 후에 203명의 3분의 2는 ‘4사5입’(반올림)하면 135명이 된다고 하여 부결선포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가결(可決)을 선포하였다. 과욕이 불러온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러한 무리수가 1960년 3 ․ 15 부정선거(不正選擧)를 잉태하고, 이것이 4 ․ 19 학생혁명으로 이어졌다.

 

1960년의 정 ․ 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부정을 자행하였다. 권력과 금력을 동원하고 4할 사전투표, 3인조 ․ 9인조 공개투표, 유령유권자 조작 및 기권자 대리투표, 야당참관인의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 갖가지 방법이 등장했다.

이를 지켜본 젊은 학생들이 분노했다. 그 시작은 2월 28일 대구(大邱)에서 불이 댕겨졌다. 이 날은 장 면(張勉) 민주당(民主黨) 부통령 후보의 대구 선거유세(選擧遊說)가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학생들의 유세장 참석을 막기 위해서 등교지시(登校指示)가 내려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경북고 ․ 대구고 ․ 경북여고 ․ 경북사대 부속고교 학생들이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것이 4 ․ 19 학생혁명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자유당 정권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3월 15일 정 ․ 부통령 선거에 갖은 부정이 자행되었고, 그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 3월 15일 오후, 마산(馬山) 시민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펼쳤다. 그런데,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가 인양되면서 마산시민들의 2차시위가 시작되었고, 그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4월 18일의 정치폭력배에 의한 고대생(高大生) 피습사건은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의 대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이어진 전국의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와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온 교수단(敎授團)의 데모로 이어졌다. 이처럼 3 ․ 15 부정선거와 12년간 계속되어 온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외침은 멈출 줄을 몰랐다.

4월 19일, 이 날은 서울의 주요 대학과 고교생들이 광화문(光化門) 네거리에 모여 “3 ․ 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면서 경무대(景武臺)로 몰려갔다. 정부는 계엄령(戒嚴令)으로 대처했지만, 젊은이들의 패기를 막을 수 없었다.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12년간의 장기집권(長期執權)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무렵 경무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 일가는 최후를 맞았으며, 자유당도 막을 내렸다. 독제자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비참한 것이다.

 

필자는 지인과 함께 혁명기념관에 마련되어 있는 4 ․ 19혁명의 실상(實狀)을 하나 하나 둘러보면서,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Seneca, L. A. : BC. 4?~AD. 65)가 남긴 명언, “인민(人民)에게 미움받는 정치는 영속하지 못한다”를 떠올렸다. 그리고, 4 ․ 19혁명이 ‘우리나라 민주화(民主化)의 씨앗이 되었구나!’를 되내이면서 기념관을 나섰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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