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어찰에 대한 답신 발굴되다
정조 어찰에 대한 답신 발굴되다
  • 최형균
  • 승인 2014.04.15 23:04
  • 호수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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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사 재해석 계기될 것으로 기대
▲“입을 세 겹으로 꿰맨 듯이 하라는 성상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는 내용이 적힌 편지. 정조 임금이 비밀유지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가 신료에게 보낸 어찰에 대한 답신이 최초로 발굴됐다. 앞서 지난 2009년에 발굴된 정조가 노론 벽파의 지도자인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 297통을 통해 정조가 신료들과의 막후교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후 1천200여통의 어찰이 추가로 발굴됐었지만 이에 대한 답신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어찰에 대한 답신은 정조의 고모이자 사도세자의 누나인 화평옹주의 시조카인 박종악이 쓴 『수기』에서 발굴됐다. 이 책은 필사본 1책(124장)으로 박종악이 1791년부터 중국 ‘사행’에서 돌아오던 도중 병사한 1795년까지 4년 동안 정조에게 보낸 비밀 편지 105편을 옮겨 적은 것이다. 어찰을 보낸 정조와 답신을 보낸 신료들이 비밀유지를 위해 편지를 불태웠기에, 앞서 만들어낸 필사본을 통해 정조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입을 세 겹으로 꿰맨 듯이 하라는 성상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미뤄볼 때 정조가 비밀유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는 19세기 후반 충청도지역에 퍼진 천주교회의 실상이 상세히 기재돼있으며 “내포 강문리, 우평리, 홍주 신당면 신평리……온 마을이 거의 다 물들었다”, “예산 두촌면 호동리 100호 가운데 물들지 않은 곳은 겨우 20호” 등의 내용을 통해 천주교 교세가 매우 빠르게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박종악은 조사 결과 공주, 당진, 덕산, 면천, 보령 등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가 발견됐다고 편지에 적었다.
이번 발굴로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오류도 수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의 천주교회사는 프랑스 신부 샤를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의존해왔었다. 이를 토대로 학계는 충청도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퍼진 시기가 1890년이라고 봤지만, 실제론 조선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이 중국에서 입국한 1874년경부터 천주교 세력이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존창은 본디 신창(新昌) 성덕산(成德山) 집안의 사천(私賤)”이란 내용은 충청도에서 천주교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존창의 출신성분에 대한 논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초 발굴자인 우리 대학 장유승(동양학연구원) 연구원은 “개별 고을에 거주하는 천주교도의 동향·출신성분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천주교가 기존 학설보다 (충청도 지역에) 일찍 들어왔다는 것이 기재돼 있기에 18~19세기의 사회변화양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발견으로 천주교회사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최형균 기자 capcomx6@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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