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性指導者, 槿友會로 뭉치다
女性指導者, 槿友會로 뭉치다
  • 권용우
  • 승인 2014.05.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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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指導者, 槿友會로 뭉치다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1927년 5월 27일, 이 날은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의 일이다.

이 무렵, 3 ․ 1 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일제(日帝)에 의하여 회유 당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상적(思想的)인 도전에 직면함으로써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위기감을 겪고 있었다. 민족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 단체의 조직을 서둘렀다. 그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단체가 신간회(新幹會)였다. 이상재(李商在) ․ 권동진(權東鎭) ․ 신석우(申錫雨) ․ 김준연(金俊淵) ․ 문일평(文一平) ․ 백관수(白寬洙) ․ 신채호(申采浩) ․ 안재홍(安在鴻) ․ 장지영(張志暎) ․ 유억겸(兪億兼) ․ 한용운(韓龍雲) ․ 홍명희(洪命憙)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는데, 1927년 2월 15일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신간회가 ‘민족유일단(民族唯一黨),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슬로우건으로 내세우고 창립됨으로써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

 

‘民族運動’을 슬로우건으로 표방하다

 

신간회의 창립은 민족주의(民族主義) 진영과 사회주의(社會主義) 진영이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던 상황을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 민족의 역량을 총집결하였다는 데 큰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여성지도자들도 김활란(金活蘭) ․ 이현경(李賢卿) ․ 유각경(劉珏卿) ․ 현덕신(玄德信) ․ 홍애시덕(洪愛施德) ․ 최은희(崔恩喜) ․ 방신영(方信榮) ․ 박원민(朴元玟) ․ 황신덕(黃信德) ․ 조원숙(趙元淑) ․ 정종명(鄭鍾鳴) ․ 박원희(朴元熙) ․ 유영준(劉英俊)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운동’(民族運動)을 슬로우건으로 표방한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근우회이다.

근우회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망라한 민족협동전선이라는 점에서 신간회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진 항일운동단체였다. 이 회는 초기에는 주로 여성을 위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으나, 신간회와 연계하여 활동을 펴나가면서 점차 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라는 민족운동으로 진전되어 나갔다.

근우회는 지방의 지회조직에도 힘을 기우렸는데, 8월 22일에 전주지회(全州支會)의 결성을 시작으로 하여 김천(金泉) ․ 평양(平壤) 등 전국 주요도시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 중국의 간도(間島)와 장춘(長春) 등 해외에도 지회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1928년 5월에는 70여개의 지회를 거느리게 되었고, 회원도 3,000여명에 이르렀다.

 

근우회에 앞서 1913년 9월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의 여교사를 중심으로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펴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라고 할 수 있다.

송죽회는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 ․ 이효덕(李孝德)과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김경희(金敬熙), 기독교인 안정석(安貞錫)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조직이었다. 황애시덕은 학생 중에 박현숙(朴賢淑) ․ 이마대(李馬大) ․ 채광덕(蔡光德) ․ 송복신(宋福信) ․ 황신덕 등을 포섭하여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자회(子會)를 설립하여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펴나가게 하였다.

송죽회는 매월 1회의 정기적인 집회를 열고, 모금된 자금을 해외독립단체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펴나갔다. 그리고, 1916년에 이르러 지방조직에도 눈을 돌렸는데, 회원이 졸업 후 각지에 취직하여 직장을 가지게 되면 근무지를 중심으로 회원을 포섭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또, 교사가 다른 지역으로 전근하게 되면 옮겨간 지역을 중심으로 회원의 확보에 나서는 방법이었다. 주요 지방조직으로는 전주 ․ 평양 ․ 황주(黃州) ․ 목포(木浦) ․ 사리원(沙里院) ․ 부산(釜山) ․ 강서(江西) ․ 해주(海州) ․ 선천(宣川) ․ 제주(濟州) 등이었다.

 

그리고, 1919년 10월 19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1920년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에서 설립된 대한부인청년단(大韓婦人靑年團), 1922년 4월에 설립된 기독교여자청년회(基督敎女子靑年會) 등도 여성독립운동단체로서 주목을 끌었다. 특히, 기독교여자청년회는 3 ․ 1운동을 통한 정치적인 독립이 실패로 끝나자 종교활동을 통한 여성의 역량을 키워 일제(日帝)를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결집한 민족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槿友會는 新幹會의 姉妹愛國團體

 

그런데, 근우회는 여느 여성단체와는 달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을 망라한 한국여성들의 전국적 단일민족협동단체로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는 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24년 5월 사회주의 여성지도자 박원민 ․ 정종명 ․ 주세죽(朱世竹) 등이 여성해방을 표방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와 1925년 조원숙을 중심으로 한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박원희를 중심으로 한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난립해 있었다. 그런데, 동경유학생 이현경이 귀국하여 김활란 ․ 유영준 등과 교섭하여 여성 민족유일당의 조직에 합의하여 조직한 것이 근우회이다. 근우회는 이에 앞선 여러 여성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새롭게 출범한 범여성단체(汎女性團體)였으며, 이로써 분열된 항일여성운동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김활란 ․ 이현경 ․ 유각경 등은 여러 차례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한 후 1927년 5월 27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김활란을 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민족유일당 근우회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근우회의 강령(綱領)은 ‘1.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기함. 2.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이었으며, 이 밖에 7개 항으로 된 행동강령(行動綱領)도 채택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이 연합한 항일여성운동단체가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근우회는 신간회의 사실상의 자매단체로서 여성의 지위향상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민족을 억압하는 법령의 철폐, 생존권의 수호, 한국어의 사용, 학원의 자유, 언론 ․ 출판 ․ 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단결권 ․ 파업권의 확립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근우회는 1931년 해산할 때까지 4년간 항일구국운동의 큰 족적을 남겼다.

87년 전, 민족주의 ․ 사회주의 양 진영이 연합한 근우회의 창립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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