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範圖, 鳳梧洞戰鬪를 승리로 이끌다
洪範圖, 鳳梧洞戰鬪를 승리로 이끌다
  • 권용우
  • 승인 2014.06.1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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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範圖, 鳳梧洞戰鬪를 승리로 이끌다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1920년 6월 7일. 이 날은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승을 거둔 날이다. 홍 장군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으로 몰려온 일본군 월강추격대(越江追擊隊)를 맞아 강력한 진공작전(進攻作戰)을 펼쳤다. 일본군 추격대가 봉오동에 당도했을 때는 대한독립군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였다. 이 때, 홍 장군이 이끈 독립군의 규모는 700여명의 병력이었다.

 

大韓獨立軍을 이끌다

 

홍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 장군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안 무(安武) 장군의 국민회군(國民會軍)이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한경세(韓景世) 장군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연합하여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대파시키고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6월 7일 1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5시까지 세 차례의 격전이 벌어졌지만, 일본군은 패전을 거듭한 나머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연합부대는 3면이 야산(野山)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홍 장군의 공격명령에 따라 동 ․ 남 ․ 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여 크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반격을 해왔지만, 이미 유리한 위치에서 공격하는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를 당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300여명의 전상자(戰傷者)를 내고, 퇴각함으로써 봉오동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런데, 봉오동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일본군을 맞아 중국의 영토에서 치룬 최초의 전투로서,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그 해 10월 21일 만주지역에 있는 우리 독립군을 일망타진하겠다며, 1만5천여 군사를 이끌고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로 몰려왔다. 이에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청산리 골짜기에서 이들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이 때,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이 공격해올 첩보를 미리 파악하고, 골짜기의 좌우 산허리와 산등성이에 2,800여명의 병력을 매복시켜놓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일본군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500여명의 전사자(戰死者)만 내고 패퇴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리전투는 백운평(白雲坪) ․ 천수평(泉水坪) ․ 마록구(馬鹿溝)에서 6일간 일본군 1,200여명의 전사자와 2,1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항일무장투쟁사에 가장 빛나는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북로군정서를 이끈 김좌진 장군과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장군의 빛나는 전훈(戰勳)이었다.

 

일본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존심이 크게 상한 나머지 간도(間島)에 거주하는 우리 한국인들을 집단학살하는 비열한 짓을 자행했다고 하니, 야만인이 따로 없다. 우리는 이를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한다.

 

武裝抗日鬪爭의 英雄, 洪範圖

 

때는 189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말미암아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격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항쟁(義兵抗爭)이 일어나 일본에 포문(砲門)을 열었다. 이에 더하여,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면서 의병항쟁은 더욱 기세(氣勢)를 올렸다. 이 무렵, 의병항쟁의 중심은 춘천(春川) ․ 강릉(江陵) ․ 안동(安東) ․ 진주(晋州) ․ 충주(忠州) ․ 홍주(洪州) ․ 나주(羅州) 등이었다.

이 때, 청년 홍범도도 그 해 11월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데, 홍범도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이 때,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강제로 퇴위되고, 통감부(統監府)가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여 통감(統監)의 지휘 ․ 감독권을 한층 강화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의 목줄이 조여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리 애국국민들이 전국에서 의병항쟁을 일으켰으며, 해산 당한 군인들이 이에 합류하였다. 이를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고 하는데, 홍범도는 이 때 함경남도 갑산(甲山)에서 척왜(斥倭) ․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차도선(車道善) ․ 태양욱(太陽郁) ․ 송상봉(宋相鳳) ․ 허 근(許瑾) 등과 함께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 홍범도는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왜군(倭軍)의 척결에 앞장섰다. 1907년 9월, 일제(日帝)는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의병항쟁을 봉쇄하기 위하여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고, 함경남도 삼수(三水) ․ 갑산 지방 포수(砲手)들의 총포(銃砲)를 회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의 산포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삼수 ․ 갑산 ․ 혜산(惠山) ․ 풍산(豊山) 등지로 총포를 회수하려 온 일본군에게 유격전(遊擊戰)으로 맞섰다. 이 싸움에서 홍범도 부대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敵)을 전멸시켰는데, 이 때 홍범도에게는 ‘의병(義兵)의 수괴(首魁)’ ․ ‘독립운동의 영도자(領導者)’ ․ ‘배일불령단체(排日不逞團體)의 영도자’ ․ ‘백두산 호랑이’ ․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名將)’이라는 명예로운 별호(別號)가 붙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홍범도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략에 놀란 일본군은 그를 가리켜 ‘날으는 홍범도’라고도 불렀다.

 

홍범도는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滿洲)를 거쳐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갔다. 이 곳 연해주는 당시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는데, 그는 이 곳에서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그 이듬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경북도 경원(慶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守備隊)를 습격토록 하였는데, 첫 전투에서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반격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봉오동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94년 전 봉오동전투의 승전을 머리속으로 그리면서, 홍 장군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는 1943년 10월 25일 이국(異國)의 땅 카자흐스탄(Kazakhstan) 크질오르다(Kzyl-Orda)에서 75세를 일기(一期)로 생애를 마쳤다. 홍 장군은 가셨지만, 그가 남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문득, 김도경 시인의 홍범도 장군 탄신 146주년을 기리는 시(詩) 「오늘이 있음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가 떠오른다.

 

“민족은 하나입니다 / 하나가 되기 위해 / 당신의 흘린 많은 눈물과 땀을 기억합니다 // 올해 탄신 146주년 / 우리는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대첩의 승전보 / 항일무쟁투쟁의 지도자 / 홍범도 투쟁의 가슴속 깊이 안고 있습니다 // …”

장군님, 부디 천상(天上)에서 우리를 굽어살펴주소서!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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