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鍾聲, 海洋國際法의 씨앗을 뿌리다
朴鍾聲, 海洋國際法의 씨앗을 뿌리다
  • 권용우
  • 승인 2015.02.1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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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聲, 海洋國際法의 씨앗을 뿌리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12일은 경해(鏡海) 박종성(朴鍾聲) 교수님의 30주기(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1985년 2월 12일, 회갑(回甲)을 얼마 앞둔 때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제자들이 오열했다. 교수님은 1925년 4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시고, 195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입학하면서 법학(法學)과 인연을 맺으셨다. 그리고, 미국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국제법학(國際法學)을 전공하였으며, 1960년 이 대학에서 "Theory and Practice of Territorial Sea"라는 주제로 법학박사학위를 영득하셨다.

그리고, 1961년 3월에 단국대학(檀國大學) 부교수로 부임하셔서 법학교수의 길을 걸으셨다. 박 교수님은 잠시 중앙대학교로 옮기셨다가, 1967년 3월 단국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이 때 대학원장으로 재부임하셔서 1985년 2월 타계하실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셨다. 단국대학교에 재직하시는 동안 대학원장을 비롯하여 출판부장 ․ 중앙도서관장 ․ 법정대학장 ․ 사회과학연구소장 등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대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海洋國際法의 씨앗을 뿌리다

 

박 교수님의 전공은 국제법이었는데, 특히 해양국제법(海洋國際法)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 분야의 많은 논설을 발표하셨다. 그리고, 이 분야의 저서로 『해양국제법』(법문사)과 『해양법특수연구』(단국대 출판부)가 있다. 이 외에도 박 교수님이 발표한 해양국제법 관련 논설을 집대성하여 교수님이 타계하신 후에 후학들에 의하여 『한국의 영해(領海)』(법문사)가 출간된 바 있다.

박 교수님은 “고전해양법(古典海洋法)의 분석”, “북양어업(北洋漁業)과 억제의 원칙”, “영해(領海)의 범위를 통일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노력”, “영해의 범위결정에 대한 시론(試論)”, “해수오탁(海水汚濁)의 방지에 관한 연구”,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에 관한 연구”, “최근 대륙붕제도(大陸棚制度)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새로운 영해(領海)의 범위”를 비롯하여 일관되게 해양국제법 분야의 연구에 몰두하시면서 이의 씨앗을 뿌리셨다. 특히, 1982년 12월, 9년 동안 진행돼오던 UN 제3차 해양법회의(海洋法會議)가 마무리되면서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이 체결되었을 때, 박 교수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시면서도 밤 늦은 시각까지 연구실에서 이와 관련된 원고를 정리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제3차 해양법회의의 역사적 의의”라는 학술논문도 발표하셨다.

그리고, 박 교수님께서는 독도영유권(獨島領有權)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는데, 1977년 8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도를 순방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獨島! 우리는 永遠히 放置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獨島東遊記’를 단대신문에 게재하셨다(1977. 9. 15, 단대신문 500호 기념호). 이 글 중에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명백한 자국(自國)의 영토(領土)이더라도 스스로 주장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독도가 비록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의 영토라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꾸준히 그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고, 타국의 주장에 대항할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수님께서 건강의 악화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타계하셨으니, 우리나라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박 교수님의 제자 사랑이 참으로 남다르셨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매일 출근과 동시에 중앙도서관에 들르셔서 법학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학생들을 격려하셨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산사(山寺)나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사법시험(司法試驗)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보시고, 간식거리를 사주시곤 하셨다. 1970, 80년대에 사법시험 준비를 했던 우리 단국대학교 법학과 학생들은 박 교수님의 이러한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이 배움의 자세를 갖추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그런 학생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쏟으셨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특정한 학생을 너무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때로는 일부의 학생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신 때도 있으셨다.

그리고, 1961년 11월 21일부터 5회에 걸친 박 교수님의 “나의 미국유학기”는 박 교수님을 이해하고, 학생 스스로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를 판단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그 때 박 교수님의 이 글에서 “Hot Dog을 개장국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빵 두 쪽에 소시지 한 토막이었음을 알았다”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아련하다.

 

學問에 눈 뜨게 해주시다

 

필자의 박 교수님과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다. 필자가 1970년 2월 단국대학교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조교생활을 하던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필자는 그 때만 하더라도 그저 막연하게 민법(民法)을 공부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박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권 군, 자네 공해(公害)에 관한 논문 한편을 써보게”라는 주문을 하셨다. 공해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눈을 뜨지 못한 시기였는데, 그 때부터 자료를 찾아서 논문(논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음)을 탈고해서 1972년 6월 단대신문(단국대학교)에 “공해의 법리와 손해배상문제”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일간신문에 스웨덴의 수도(首都) 스톡홀름(Stockholm)에서 「UN인간환경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가 개최된다는 특집기사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필자는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단숨에 박 교수님 연구실로 달려가서 “교수님, 이것 좀 보십시요”라고 하면서, 신문을 교수님에게 내밀었다. 그 때 무표정하셨던 교수님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필자로부터 신문을 받아드신 교수님께서는 ‘뭐, 그까짓 것을 가지고’ 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며, “권 군, 내 눈에는 진작부터 이런 것이 다 보였네”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공해의 피해가 대단히 심각할 걸세. 국가의 차원에서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야”라고 진지한 어조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박 교수님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74년으로 기억된다. 필자에게 “의료과오의 책임법리”, “제조자책임의 법리”에 관한 연구과제를 주셨다. 그 후로 이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이에 관한 국내의 선행연구(先行硏究)는 한 두 편이 고작이었다. 몇 개월 동안 노력하여 작성한 이에 관한 논문을 법무부에서 간행하는 「법조」(法曹)에 연이어 발표한 바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불법행위(不法行爲)에 관한 논문이 10여편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것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욕심의 결과로 1974년 8월에 출간한 것이 『불법행위론』(고시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보잘 것 없지만, 우리나라 불법행위법 분야의 최초의 단행본이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박 교수님은 필자에게 방대한 민법 중에서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갖게 해주셨다. 이 후, 필자는 불법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집필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로 “공해소송과 인과관계의 입증(상, 하)”, “공해방지법개정을 위한 재검토(상, 하)”, “농약오염과 그 규제”, “임해공해(臨海公害)의 판례에 관한 연구”,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청구권자(慰藉料請求權者)의 범위”, “식품공해와 제조자책임”, “환경소송과 인과관계론”, “공해판례에 나타난 인과관계론의 동향”, “명예훼손과 불법행위책임”, “노동능력상실과 손해배상”, “광해(鑛害)배상책임의 법리”, “불법행위와 과실상계”, “약화사고의 책임”, “사용자책임과 구상권의 제한”, “우리나라 불법행위법의 최근동향” 등에 관한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또, 필자가 1979년 한국환경법학회 동계 심포지엄에서 “환경분쟁조정제도의 효율화”를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1978년 공해방지법(公害防止法)을 폐지하고 새로 제정된 환경보전법(環境保全法)상의 환경분쟁조정제도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중심으로 한 것인데, 이 또한 불법행위법 분야의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불법행위에 관한 논문들이 쌓이게 됨으로, 이들 논문들을 보태어 1974년에 간행한 『불법행위론』을 수정, 보완하여 1998년 신판 『불법행위론』(신양사)을 출간한 바 있다.

필자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안으로 현명한 아버지나 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능히 이룸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30年 전으로 돌아가서

 

지난 12일, 박 교수님의 30주기를 맞아 교수님 생전에 교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제자 몇 사람이 박 교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묘소를 참배하고, 추모예배의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교수님의 묘소에 둘러앉아서 30년 전으로 되돌아가 박 교수님의 학문세계와 제자사랑을 화제로 삼아 예기의 꽃을 피웠다.

박 교수님은 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항상 ‘바다’에 대한 얘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1973년에 출간한 『해양법특수연구』의 머리말도 ‘바다’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였다. “제21세기는 바다의 시대이다. 인간은 필요한 에너지를 바다에서만 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중(水中)에서 거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바다는 진실로 인간의 생명선(生命線)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그러므로 해양(海洋)의 질서를 유지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기본사명이 아닐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그 날, 이런 얘기도 당연히 우리의 화제였다.

그런데, 박 교수님의 전공분야는 해양국제법이었지만, 전공의 벽을 뛰어넘어 참으로 다방면에 걸쳐 넓고 깊은 지식의 소유자이셨다. 종교 ․ 철학자와 만난 자리에서는 존 듀이(John Dewey)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경제학자와 만난 자리에서는 사무엘슨(Samuelson, P. A.)이나 드러커(Drucker, P. F.)를 말씀하셨다. 박 교수님의 막힘 없는 말씀에 대하여 그 분야의 전공자들도 머리를 숙였다. 필자는 여러 차례 그런 장면을 지켜보면서 ‘박 교수님께서는 참으로 공부가 깊으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교수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눈 다음에 연구실로 돌아와서 그 대화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박 교수님의 말씀은 모두 학문과 관련된 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묘소에서, 필자는 문득 이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박 교수님이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을 느꼈다.

또, 이 자리에서는 박 교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따님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와 외손녀가 우리와 함께 30년 전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박 교수님의 따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권면과 위로’의 말이 아직도 찡하게 가슴을 적신다. “사람들은 세상에 왔다가 떠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높은 사람도 가고 낮은 사람도 가고, … 세상 떠난 사람을 땅에 장사하게 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작별이라고 하여 영결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 여기 육신으로는 벌써 30년 전에 죽음으로 이 땅에 묻혀 있지만 아버님도 이 복음의 말씀을 믿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가 되면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기뻐하며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이 권면과 위로에 숙연한 마음으로 박 교수님께서 생전(生前)에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교수님께서 천상(天上)에서 명복(冥福)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렸다. 그리고, 묘소를 뒤로 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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