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國父, 리콴유를 그리다
싱가포르의 國父, 리콴유를 그리다
  • 권용우
  • 승인 2015.03.2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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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國父, 리콴유를 그리다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23일, 싱가포르(Republic of Singapore)의 국부(國父) 리콴유(LEE KUAN YEW)가 싱가포르 전국민들의 애도(哀悼) 속에 91세를 일기(一期)로 서거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이 날로부터 모든 관공서(官公署)에 조기(弔旗)를 게양하고 7일간의 애도기간을 정한 가운데 슬픔에 잠겨 있으며, 전세계가 그의 서거를 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리콴유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애도성명을 발표하였으며, 29일에 개최되는 국장(國葬)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리콴유를 가리켜 “고인(故人)은 한(韓) · 싱가포르 관계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지혜를 주신 우리 국민의 친구였다”며, “부모님 같은 정(情)을 주신 분”이라고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리콴유는 1959년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초대 총리직(總理職)을 맡아서 나라를 이끌어왔는데, 31년간 집권하는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59년, 그 당시 싱가포르는 부존자원(賦存資源) 하나 없는 가난한 어촌(漁村)에 불과하였다. 마실 물도 없어서 말레이시아에서 사와야 하는데, 물 살 돈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36세의 총리 리콴유는 스스로 빗자루를 들고 거리청소를 하면서 나라를 이끌었으며, ‘친(親)기업’ 전략을 펴면서 모든 국민이 안심하며 잘 사는 부국(富國)으로 성장시켰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과감하게 개발독재(開發獨裁)를 선택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식 민주주의(民主主義)를 밀고 나갔다. 말하자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민주주의보다 배부른 독재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병행하는 경제발전은 어렵다고 본 것이었다.
현재의 싱가포르는 국토(國土)의 면적이래야 우리나라 서울의 1.18배의 크기에 인구 546만명의 작은 나라이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이 5만6,000달러로 세계 8위(아시아 1위)의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강소국(强小國)의 롤 모델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가진 거인(巨人) 리콴유의 실용주의(實用主義)에서 피어난 값진 꽃봉오리이다.
오늘의 싱가포르의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맹자(孟子 : BC. 372~289)가 남긴 명언, “어진 정사(政事)를 펼친다면 지경(地境)이 사방 1백리일 뿐이라도 왕(王) 노릇할 수 있다”를 떠올린다.

淸廉國家를 건설하다


1959년, 리콴유는 총리취임 일성(一聲)으로 ‘반(反)부패’를 부르짖었다. 말하자면, ‘부패 없는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부패(腐敗)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는 공무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그 대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 가차없이 처벌하고 재산까지 몰수했다고 한다. 그의 친인척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참으로 잘 정돈된 나라, 깨끗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잔디 위를 걸을 수 없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안 되는 나라이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깨끗한 거리를 가진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 아시아의 한 마리의 용(龍)으로 자라게 하였다. 그러나, 리콴유에게는 많은 적(敵)이 있었다. 인권(人權)과 자유(自由)를 외쳐대는 반대자들은 그의 정책을 가리켜 ‘독재(獨裁) 개발’이라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비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의 정책을 저돌적으로 밀어부쳤다. 리콴유는 맹목적이기만 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언제나 남의 말에 귀기울리면서,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리콴유의 머리 속에는 공직사회(公職社會)가 깨끗하면 모든 분야가 깨끗해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설치하여 그의 청렴의지를 펼쳐나갔다. 현재 국가청렴도지수가 세계 5위에 올라 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수치이다.
부패 없는 싱가포르를 보면서 ‘김영란법’ 졸속입법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 속담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이 있다. 우리 국회가 하루 빨리 ‘김영란법’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우리 국민 모두가 ‘부정부패 없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건설에 매진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런데, 리콴유는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가진 정치가였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에 세 차례, 퇴임 후에도 세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1979년 10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서거 1주일 전에 방한(訪韓)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나라와의 좋은 인연이 이어져왔다.
리콴유, 그는 싱가포르 전국민의 추앙을 받으면서 영면(永眠)의 길을 떠났다. 사람은 떠날 때 박수를 받아야 한다. 그의 명복(冥福)을 빌면서, 이 글을 맺는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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