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의 변명
송병준의 변명
  • 김명섭 사학과 강사 ·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01 14:14
  • 호수 13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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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출세하고 싶었다
▲ 일제시대 조선명승지의 하나로 꼽힌 용인 추계리의 송병준 별장 모습
구천을 떠도는 소인을 굳이 단국의 젊은 백성들 앞에 불러내다니 원망스럽소. 한국인 대부분이 본인을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 매국노 제1호’로 일컫는 걸 잘 알고 있소. 하긴 생전에도 시내로 나가면 일본인들조차 나를 ‘매국노’·‘망국대신’이라 손가락질해 망신을 당한 적 많으니, 체면 따위 잊은 지 오래오. 또 내 후손들도 해방 후 잃어버린 내 땅을 찾으려 소송을 벌여 2005년 친일재산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2건 승소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 하니, 내 집안의 뻔뻔함보다 대한민국의 관대함에 감읍할 따름이오.

굳이 친일매국노가 된 이유를 밝히자면, 어차피 망할 나라에 장부로 태어나 나도 한몫 챙겨 출세하고자 했을 따름이오. 사실 내가 쓴 약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손으로 서울의 명문가에서 자랐다 적었지만, 사이토 조선총독 조차 뒷조사를 시켜 내 부친이 소를 파는 천민이며 생모가 기생이란 비밀을 밝히고 말았소. 미천한 서자출신으로 온갖 구박을 받은 나는 거지노릇을 하다 서울로 흘러와 우연히 민영환 집안의 기생 눈에 들어 문지기가 되었소.

세도가에 들어선 후 일본 군납업자인 오쿠라와 부산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며 일을 배웠으니, ‘매판·합작업자 제1호’란 기록을 세우게 되었소. 하지만 나는 곧 무관으로 입문하였고, 민씨척족들에 뇌물을 주어 사헌부 감찰까지 올랐소. 그런데 1881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피난 가야 했고, 갑신정변때도 친일파로 몰려 집이 불타기도 했소. 다행이 민씨들의 비호를 받아 1889년 용인군의 양지현감을 제수받았고, 장위영 영관도 겸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도 나선 바 있소. 그러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분노한 민중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소.

내 제2의 인생은 10년 망명생활동안 명치유신을 주도한 후쿠자와 유기치, 육군대신이며 초대 조선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 쟁쟁한 정계인사들을 만나면서 꽃피우기 시작했오. 결국 러시아와의 일전이 벌어진 1904년 2월 일본군 소장의 통역 자격으로 ‘금의환향’하였고, 용산 사령부 안에 주보(PX)를 운영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소. 그리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어리석은 의병들을 진압하고 군부 이권을 챙기기 위해 일진회를 조직하였소.

일진회는 항일인사들을 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일부터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고종황제를 폐위시키는 일까지 궂은일을 도맡아했소. 이런 공로로 나는 1907년 농상공부 대신에 이어 내부대신과 중추원 고문에 오르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소. 하지만 태생이 천박한 탓인지 순종 앞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외국영사들과 싸운 탓에 2년만에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소. 그래도 한일합방때는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5만엔을 받아 챙길 수 있었소.

3·1운동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공작금 5만엔을 받기도 했고, 철도와 회사를 비롯해 기생업과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댔소. 은인이던 민영환의 땅도 허위증서 한 장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 놓아 욕도 먹었소. 죽을 무렵인 1925년 2월 일본 천황으로부터 포도주와 함께 최고훈장을 받고 백작작위도 아들 종헌에게 물려 줄 수 있었소.

허나 내 죽고 나니 재산분할과 채권청산을 요구하는 소송이 왜 그리 많이 벌어지는지, 게다가 미련한 아들놈이 가산을 탕진하여 총독부의 연금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소. 후손들도 친일파란 비난이 두려워 용인 추계리의 내 무덤을 파 화장하여 흔적도 없애 버렸으니, 권력이 무상하오. 하지만 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후대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오. 국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는 나 같은 역적이 나오지 않으려면, ‘송병준기념관’이라도 세워 거울로 삼아야 하는 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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