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후회
이광수의 후회
  • 김명섭 사학과 강사 ·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01 14:51
  • 호수 13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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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덧없이 사라져야 하는가
▲ 1941년경 서울 효자동 집에서의 이광수.
1950년 10월 25일, 여기는 조선의 끝자락 압록강 중류에 있는 함경북도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지난 7월 20일 서울 효자동 집에서 인민군에게 끌려나와 평양을 거쳐 적유령산맥을 넘어 이곳 춥고 음산한 만포까지 미군의 공습을 피해 납북되어 왔소. 살을 애이는 추위와 1주일간의 굶주림 그리고 지병인 폐결핵까지 겹쳐 이제 60생을 놓으려 하니,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려.

초등교육을 받으신 분은 알겠지만, 나는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와 최남선과 더불어 구한말 조선 3대 천재로 꼽히는 수재였소. 5살때부터 이미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살에 사서삼경을 읽어 한시백일장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평안도를 떠들썩하게 하였소. 그러다 부모님을 잃으니 1905년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소.

도쿄는 칙칙한 조선의 가난과 봉건악습을 한방에 날려버려 줄 신천지같은 곳이었지요. 난 망국노의 설움에서 벗어나 맘껏 자유와 신문물을 만끽하였고, 메이지학원에서 서양세계를 동경하며 창작의 꿈을 키웠소. 5년만에 귀국해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소.

1911년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갔다가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귀국하였고,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공부하였소. 1917년 1월 1일부터 여러분들이 중․고교 시절 달달 외웠을 그 유명한 한국 최초의 현대적 장편소설인 《무정》을 연재하였소. 이어 귀국해 단대신문에도 소개된 바 있는 남한5도 답파여행을 다녀와 기행문을 연재했소. 봉건악습을 비판하는 글도 많이 써 유명해졌지만, 애정 없이 만난 아내와 합의이혼한 후 나를 돌봐준 여의사와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난 일로 더 유명해 진적도 있었소.

내 한때 민족지도자가 된 것은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열린 독립운동에 선언서를 기초한 일이오. 그리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가 발간하는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해 애국계몽의 글을 발표했을 때이오. 하지만 내 조선인의 유약한 민족성을 완전 딸바꿈하여 일본인처럼 선진시민이 되자는 주장을 담은 글을 《개벽》과 《동아일보》등에 발표하자, 자치론이라며 비난이 쏟아졌소.

그러다 1940년 내가 앞장서 가야마 미쓰로란 일본이름으로 개명하고, 미국․영국과 대항하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니 변절자란 멍에를 쓰게 되었소. 물론 1943년부터 일본군대의 자랑스런 일원이 되는 학도병이 될 것을 권유하는 글을 쓰고 대학과 공장 등에서 연설을 하니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었소. 난 젊은 날을 일깨워준 일본제국이 이리 쉽게 망할지 몰라 후회스럽지만, 그래도 자유연애와 봉건폐습을 거부하고, 농민계몽과 여성해방을 위해 힘썼다고 자부해왔소.

하지만 내 친일행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으니,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에 따라 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소.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공산군이 서울로 들어와 나를 이 조선 끝자락까지 끌고 왔소. 내 글을 읽고 공부하는 젊은이들이여,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천재, 변절한 지식인이 나오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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