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미래의 성장통 2. 민주적 갈등관리를 위한 과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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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쟁해결연구소
  • 승인 2015.04.02 04:04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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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와 굴업도 방폐장 입지 선정

1978년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가 상업가동을 시작한 이후 정부는 원자력발전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의 입지선정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이 시기의 후보지 선정 과정은 정부가 기술적 타당성을 근거로 후보지를 압축한 후 해당 지역 자치단체장, 관련부처, 주민의견 청취로 이어지는 하향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주도의 후보지 선정은 사전 검증과정이 취약하고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쉬워 입지선정이 무산될 소지가 많았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안면도와 굴업도 입지선정 시도이다.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려진 안면도가 방폐장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1990년 11월 2일이었다. 당초 정부는 원자력발전소가 설치된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방폐장 부지를 물색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자 당시 충청남도가 구상중인 ‘서해안 종합개발’과 연계한 ‘서해과학연구단지’ 조성의 일환으로 방폐장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안면도 주민들은 즉각 반대대책위원회를 설립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자녀들의 등교를 거부시키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부는 11월 6일 안면도 과학연구단지 내 핵폐기물의 중간 저장 및 연구시설을 유치하는 것으로 영구처분장을 설치하는 것은 아니라며 성난 지역여론을 달랬지만, 시위는 갈수록 격화되어 주민들이 공무원을 폭행하고 승용차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으로 치닫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론들이 주민들의 반대시위를 ‘과격시위’라는 프레임으로 다루고 정부의 건설의지를 강조하여 주민들의 저항운동을 격화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어떠한 시설도 건설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정부가 1년 뒤인 1991년 10월 방폐장 후보지에 안면도를 포함시키면서 반대대책위가 재구성되는 등 사태의 재발이 우려되었으나 이듬해인 1992년 3월 8일 정부가 안면도를 최종후보지에서 제외한다고 밝히며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굴업도는 인천시 옹진군 덕적군도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km, 모섬이라 할 수 있는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절경으로 유명했고 천연기념물인 매, 황구렁이, 황새 등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로 알려진 이 섬이 방폐장을 둘러싼 소동에 휩싸인 것은 1994년 겨울의 일이었다. 1994년 12월 22일 정부가 굴업도를 방폐장 부지로 확정하자 덕적도 주민들이 정부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정부는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하고 기술적 근거를 제시하는 등 진화에 나섰지만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정부가 주최한 토론회가 일방적인 홍보의 장으로 전락했고 기술적 문제에 있어서도 지진의 우려가 있는 활성단층이 발견되었다며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 계속 저항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1995년 2월 27일 굴업도를 방폐장 부지로 최종 확정하고 인근 지역에 대한 500억원의 특별지원금을 배정하는 등 절차를 진행해 나갔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아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던 와중에 사태는 급작스럽게 종결되었다. 과학기술처의 지질특성 조사 중 활성단층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정부는 11월 30일 최종적으로 굴업도 방폐장 설치 계획을 백지화했다.

이 시기 정부의 입지선정 및 대처과정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방폐장의 설치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임에도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전격적으로 후보지를 낙점하고 발표한 안면도 사례와 굴업도 주민들의 찬성은 얻었지만 인접한 덕적도 주민들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했던 굴업도 사례는 결과적으로 계획의 실패는 물론이고 정부에 대한 불신조장, 지역주민들 간의 갈등이라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까지 가져왔다. 이와 같이 당시 정부의 방폐장 입지선정 계획은 관련 지역주민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만을 남긴 채 다시 표류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그간의 정책실패를 인정하여 소관부처를 산업자원부로 변경하고 중앙정부 주도의 입지선정 방식을 지자체 주도의 공모방식으로 변경하였으나 2003년 일어난 부안사태는 그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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