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미래의 성장통 3. 허울뿐인 민주적 갈등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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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쟁해결연구소
  • 승인 2015.04.02 04:07
  • 호수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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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사태

안면도와 굴업도에서의 실패 이후 정부는 사업자주도의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 입지선정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부는 이 문제의 소관부처를 과학기술부에서 산업자원부로 변경하고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유치공모 방식을 채택하는 한편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자체에 3,0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는 등 당근책을 마련했으나 실제 공모에 응한 지자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다시 사업자주도 방식으로 전환하여 2003년 영덕, 울진 등 예비후보지를 선정했으나 지역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무산되었고 정부는 다시 유치공모 방식으로 선회했지만 유치를 희망하는 지자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인 2004년 7월 11일 부안군이 육지에서 15km 떨어진 섬인 위도지역에 방폐장을 유치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나섰다.

부안의 방폐장 유치 신청은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날까지도 김종규 부안군수는 주민들의 반대를 이유로 핵폐기장 유치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고 같은 날 김 군수의 유치 기자회견 직후 군의회에서도 위도 주민 10명이 제출한 ‘원전수거물관리시설 유치신청’ 청원건을 7대 5로 부결시키는 등 방폐장을 둘러싼 지역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수의 독단적인 결정은 곧바로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반대하는 주민 측은 곧바로 ‘핵폐기장 백지화·핵발전소 추방 범부안대책위’를 출범시키고 반대운동에 나서기 시작했고 14일 김 군수가 산업자원부를 방문해 방폐장 유치신청서를 제출하자 저항은 본격화되었다. 대책위는 1,000여명이 참석한 대규모 반대시위를 개최했고 매일같이 계속된 시위의 규모는 점차 확대돼 8월에 들어서자 시위는 10,000명 규모까지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해 주민지원책을 내놓는 등 민심달래기에 나섰으나 시위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폭력적으로 치닫기에 이르렀다. 학생들도 등교거부 투쟁을 병행하는 등 저항의 수위를 높여갔다. 폭력사태의 책임소재를 놓고 양측 간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앙정치권도 본격적으로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조사특위를 구성해 정부의 대처를 비판하는 등 상황이 한층 더 복잡해지는 가운데 김 군수가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폭행사건 이후 부안에 경찰병력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했으나 이는 충돌을 더욱 격화시켜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좀처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사태의 돌파구 역할을 한 것이 주민투표였다. 11월 시민·사회단체 중재단의 주민투표 제안을 주민 측이 받아들이고 같은 달 26일 노무현 대통령이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한다면 방폐장 건설을 추진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입장을 밝히자 양측 모두 주민투표를 통한 사태해결로 협상의 가닥을 잡게 되었다. 결국 관련법안 정비 후 실시를 주장한 정부 측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의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한 주민 측의 이견이 끝내 좁혀지지 않아 협상은 결렬됐지만 주민 측은 독자적으로 주민투표를 추진했고 2005년 2월 14일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투표율 72%, 반대 91.8%라는 압도적 결과가 나옴에 따라 부안의 방폐장 유치는 완전히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 정부는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 지자체 유치신청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고려치 않은 채 정부와 지자체장간의 물밑합의로 유치를 결정하고 이에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함으로써 계획이 무산되는 등 과거의 실패사례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태의 진행과정 속에서 나타난 정부의 유연하지 못한 의사결정방식과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는 시위진압 과정의 ‘과잉진압’ 논란과 함께 ‘참여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에까지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 정부는 부안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모색하였고 그 열쇠는 역시 주민투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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