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5. 알바하는 ‘나’, 여행가는 ‘너’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5. 알바하는 ‘나’, 여행가는 ‘너’
  • 배한올(영화·15 졸)
  • 승인 2015.04.07 18:51
  • 호수 13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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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불빛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나’는 개츠비가 되었다
▲ <일러스트 사현진 기자>

방학이 되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마루타라고 불리는 생동성 알바를 뛰어서라도 학비를 벌어야 하고, 너는 부모님 돈으로 유럽여행을 떠난다. 나는 알바를 하느라 내일 과제를 할 시간조차 빠듯한데, 너는 이미 과제를 끝내고 자격증 공부를 한다. 대학 안에 이런 너와 나는 수도 없이 존재한다. 물론 너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함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간다. 알바를 해서 번 돈은 20대의 시간과 나를 팔아 얻어낸 대가이다. 젊음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젊음을 팔아 손에 쥔 돈의 액수는 터무니 없이 적다. 이 돈을 쪼개고 쪼개 하루를 연명한다. 대학생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는 같은 시공간을 다르게 살고 있다.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젊음의 도전과 열정에는 돈이 든다.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도, 시험도, 대외활동에도 돈이 든다. 경험을 미끼로 열정 페이를 제시하는 하이에나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은 곪는다.

이런 우리를 보고 어른들은 말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아껴 쓰면 되지. 그게 다 젊음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부아가 치민다. 기성세대는 현재 대학생을 소비지향적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좋은 옷, 좋은 신발을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최저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한다. 최소한 인간으로서 소통을 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하는’데 돈이 든다. 학교에서 학식만 먹고 친구들과 차를 한 잔만 마셔도 이미 만 원이 넘게 나간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없으면 사회적 고립된다. 어쩌면 대학생은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인 취약계층이다. 자유에 제한이 있어 고만고만하던 것은 끝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산을 하는 사회인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대학생은 공부도 생산도 어정쩡한 빈곤층이다. 하지만 빈곤층이라는 것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대학생에게 돈은 자유이다. 살아갈 수 있는 자유. 게오르그 짐멜은 ‘돈의 철학’에서 근대 이후 돈이 개인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돈은 신분의 족쇄를 풀어주었고 수평화되고, 평등화된 사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삼성의 CEO가 될 수도 있고, 만수르처럼 구단주가 될 수도 있다. 가능성의 영역에서. 하지만 이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돈의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소유는 물체를 자아에 연결하는 행위이다. 놀랍게도 자아는 물체를 연결하여 확장되며, 소유로 인해 자아가 성장한다. 돈은 소유(자아의 성장)를 약속하기 때문에 강력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이해하지 못 했다. 대학생이 되어 보니 개츠비는 ‘나’였다. 부가 뿜어내는 불빛에 뛰어드는 불나방이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매료되었다. 늘 신선한 옷차림과 넓은 집이 주는 신비로움. 그 뒤에는 환희의 약속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개츠비가 좇은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부였다. 돈은 자유의 약속이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우리에게 의식할수록 더 조여오는 족쇄처럼 돈의 양은 우리의 가능성을 저지한다.

하지만 돈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내재하는 한계에 의해 자아의 확장이 멈춘다. 그 이유는 사물들의 완전한 순응성(사물들은 우리의 소유 행위를 저항없이 받아들인다)에도 불구하고, 인격이 일정량의 사물을 소유하게 되면 그 힘은 과부하를 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마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유가 돈의 형식을 취할 때에는 가장 늦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과 돈의 소유 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 관계의 특징적인 원인이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돈의 순수한 양이다. 돈이 돈을 낳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돈의 양과 능력과 인격을 같은 선상에 두기 때문에 우리는 루저가 될 수 밖다. 부자는 능력이 남들보다 유별나게 좋은 것이고, 능력은 부자의 특별한 부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가 비약되어 능력을 인격과 결부시키면서 문제가 생긴다. 대학생이 바로 부를 이룩할 수도 없음에도 이미 루저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페이스북에서 벌어지는 부의 전시는 이 불쾌함을 더 부추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우리는 오늘도 부단히 뛰어야 한다. 사실 억울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아무리 뛰어도 날고 있는 애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자유가 주는 이 고통을 견뎌야 한다. 돈으로 인해 높아진 자유의 세계에서 우리는 넓은 자유를 봐야 한다. 돈은 우리에게 종(x축)의 자유를 준다. 하지만 세상에는 종만 있지 않다. 횡(y축)이 넓게 펼쳐져 있다. 높게 뛰는 자유는 없으나 우리는 넓게 걸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인간은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돈에 의한 자아 확장은 한계가 있고, 우리는 다르게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 오늘도 불안한 미래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는 우리를 사랑하자. 그래. 너는 여행을 가고 나는 알바를 뛴다. 잘 다녀와라.    

배한올(영화·15 졸)
배한올(영화·15 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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