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25. 이동휘의 외침
역사고백25. 이동휘의 외침
  • 김명섭 사학과강사 ·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08 10:24
  • 호수 13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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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임시정부를 세웠는가

진달래가 꽃망울을 열 무렵인 4월 11일은 1919년 3월 피의 항쟁을 벌인 조선인들이 독립의 열정과 염원을 담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날이오. 전날 밤 10시 중국 상해의 불란서 조계 작은 건물에 모인 29명이 밤 새워 국호와 관제를 정하여 11일 가결하였소. 이런 기사록이 남아있거늘, 왜 아직도 법통을 이었다는 대한민국 정식정부의 후손들은 13일을 기념일로 고집하는지 모르겠구려.

나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고 설령 알아도 레닌과 만나 혁명자금을 받은 한국공산당의 원조격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은 줄 아오. 나는 이승만씨가 미국에 위임해 통치하게 하자는 청원을 내어 분란을 일으켜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하자,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그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왔소. 내 혼란과 분열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조직체계를 갖추고 러시아 노농정부와 공수동맹을 맺어 독립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주도록 했으니, 기틀을 만든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본디 조선국왕 친위대에 근무했던 부친을 이어 1907년까지 강화도에서 진위대를 이끌던 군인이었소. 학교도 세워 유명인이 되었고, 전국 애국지사들이 모인 신민회에도 가담하였소. 1909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다가 잡혀 유배생활도 했고, 105인 사건에도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소.

일본정부의 추적을 피해 난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고, 곧 망명유민들이 많이 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였소. 이곳에서 난 신문을 발행하고 무장부대를 많이 조직하였소.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나는 조선독립을 앞당길 희망에 부풀어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들었소. 그리고 광동에 가서 중국 혁명 아버지인 손문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고, 상해로 가 임정의 총리가 되었소.

하지만 기대와 달리 임정은 이승만 등 양반귀족출신들이 외교를 통한 독립과 실력양성론에만 억매여 논쟁만을 일삼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키려는 나와 갈등이 많아 15개월만에 직을 던지고 연해주로 돌아왔소. 그래도 러시아정부의 후원을 받고자 모스크바로 찾아가 레닌을 접견하게 되었소. 레닌은 나와 박진순을 따스히 응대해주며 1시간동안 조선의 실정을 물었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소. 그로부터 200만 루블이란 거금을 원조받기로 했고, 그중 40만 루블을 들여와 독립신문 만들고 무기구입하는데 투자하였소.

허나 그 돈으로 내 조직인 고려공산당을 만드는데 유용했다는 임정내의 비난이 거세져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소. 난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고려혁명당을 이끌며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사회주의노선을 걸었소. 말년에는 독립운동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는 국제혁명자후원회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35년 1월 눈을 감았소. 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크게 힘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나와 같이 무장투쟁으로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열혈남아들이 많았음을 대한의 청년들이여 기억해주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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