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6. 나는 오늘도 혼자 학식을 먹는다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6. 나는 오늘도 혼자 학식을 먹는다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04.14 22:56
  • 호수 13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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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이 두려운 것은, 고독의 사유가 부담스러워서

식판을 내리고 자리에 앉는다. 줄곧 시선은 한 군데로만 박혀 있다. 기계처럼 수저질을 반복한다. 우리는 군중 속의 외딴 섬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우리 또한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맛을 음미할 겨를조차 없다. 마치 빈 연료통에 연료를 채우듯이, 우리는 위장 속에 음식을 밀어 넣는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면, 기다렸다는 듯 우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혼자 먹는 밥은 항상 옆구리가 허전하다. 대학 삼년차가 되었어도 이것만큼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 특히나 식당에 사람이 붐비는 시간일수록 더 그렇다. 허기만 채우면 될 것을, 몰려다니며 먹는 게 언제부터 인간의 습성이 된 건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가벼운 토론이나마 함께해줄 상대조차 없다. 우리는 밥알과 함께 오만가지 잡생각을 되삼켜야만 한다. 정말이지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생각이 많아져서 우린 견디기 어려워진다.

홀로 식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 동안만이라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훗설이 인간 의식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우리는 단 한 순간조차  생각이 완전히 단절된 지경에는 이를 수가 없다. 홀로 있는 시간의 생각들은 오로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대답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에 대해 편리하게 규정해줄 타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그래서 항상 치명적이다. 생각의 끝없는 연쇄가 우리 영혼을 피곤함으로 이끈다.

혼자 먹는 밥이 두려워지는 것은, 그처럼 고독 속에서 사유함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우리가 은연중에나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점심시간, 그토록 범람하는 대화의 홍수 속에 내게 말 거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 혹여 말 걸어주는 누구라도 있다면, 나는 그와 함께 이 주제 저 주제로 정처 없이 옮겨가면서 당장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잡담(Gerede)’이란 그것의 근거(언급하는 대상, 즉 존재자와의 관계)를 상실한 말이라고, 하이데거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달콤한 잡담 속에서 우린 존재자를 겉핥기 하는 수준으로 만족하고, 근원적 사유의 피곤함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잡담할 이가 없어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에 이끌리며 가십거리만 늘어놓을 상대라면 누구에게라도 얼마든지 있다. 참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잡담이 아닌 진정성 있는 대화이다. 고독 속의 사유가 주는 피곤함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우린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유의미한 대화 상대를 찾지 못했다면, 차라리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집중하는 하는 편이 낫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말 걸어오는 존재(Sein)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실상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치열하게 사유하고 대답해야 할 근원적 목소리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바깥, 즉 일상과 단절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주변의 생활세계를 넘어 일종의 신(神)적 세계로 초탈해가기엔, 우리의 육체는 너무도 제약되어 있다. 우리는 근원적 사유와 관계함과 동시에, 지상의 생명으로서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한다. 생물적 욕구는 기필코 충족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먹고 마시기를 중단한다면 이내 굶어죽고 만다. 시인이 쓰고 있듯,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최승자의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에서) 끝끝내 우리는 이곳 지상에 살아남아, 우리가 겪는 인간적인 고민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것이다.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도 제대로 된 것이라면, 우리가 내던져진 이곳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구차하게 편의점 도시락을 사들고 화장실로 가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굳이 학생식당의 저 많은 인파 속에 홀로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저들 속에 섞인다. 아무리 대단한 고민을 겪고 있는 철학자라도, 결국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말한다. “나의 종교적 존재가 나의 외적 존재에 어떻게 관계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것을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불안의 개념』에서) 신 앞에 ‘단독자(Der Einzelne)’로 홀로 선 고귀한 ‘종교적 존재’가 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외적 존재’와 관련하여 해명되어야 한다고 키에르케고어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단독자는 세상 한가운데를 살아가며, 또한 그는 홀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말없이 혼자 밥알을 씹어 넘기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 모두가 저마다 세상살이의 시름을 버텨내는, 평범한 인간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김성현(철학·3)
김성현(철학·3)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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