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25. 이회영의 결심
역사고백25. 이회영의 결심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리스트
  • 승인 2015.04.15 11:40
  • 호수 13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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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주로 떠나는 이유는
▲ 45세에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화사한 벚꽃보다 수줍게 피는 산앵두나무꽃이 그리운 4월이구려. 나는 서울 남산골에서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삼한갑족인 경주이씨 가문에서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소. 우리 6형제의 우애는 남달리 두터워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즐거웠고, 앵두나무같이 화사했었소. 이런 형제애 덕분에 1910년 망국을 맞아 내가 만주로 독립군 기지를 만들자며 망명을 제안했을 때 서로 뜻을 맞추어 떠날 수 있었소.

3개월만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그 많은 토지와 가산을 시급히 정리하고 6가족 60명을 조용히 이끌어 12월 31일 압록강을 건너려하니 얼마나 바쁘고 조마조마하고 가슴 아팠으리오. 600억여 거금을 헌사한 둘째형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3500여 독립군을 길러 청산리․봉오동전투를 승전하고 수백여 식솔들을 만주벌판에 정착시키기란 불가능했을 것이오.

내 고종황제와도 인연이 많으니,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을 기획한 바 있고 1918년 국내로 잠입해 고종의 북경망명을 추진하다가 적들의 독살로 실패한 바 있소. 그렇게 3․1운동이 일어나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지만, 정부라는 행정부 조직보다 독립운동세력을 규합할 지도부 구성이 시급하다는 내 생각이 받아들이지 않아 임정을 떠나고 말았소. 이후 난 동생 시영과도 결별한 채 북경에서 의열단과 만주 독립군을 지도했는데, 외교노선보다 직접행동과 무장투쟁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고 독립을 더 빠르고 당당하게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오. 내가 56세의 늦은 나이에 아나키즘이란 서구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권력욕과 지배욕, 철의 규율과 일당독재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와 공산주의를 배척하기 위해서요. 신분과 지역·이념의 차이를 넘어선 자유로운 개인과 단체들이 모여 독립운동 지도부를 구성하고, 이들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시민들과 연합하여 제국주의와 투쟁한다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오. 독립된 나라는 권력집중을 막고 자율과 자치의 지방분권이 확립되어야 하고, 교육은 국가비용으로 의무실시해야 하며, 외교와 국방·국제무역 등만 중앙정부에서 관장하는, 미국과 스위스 같은 연방정부의 모습의 될 것이오.

나와 동지들은 이러한 자유·평등·공동체의 새 나라 건설을 꿈꾸며 때론 총과 폭탄을 들고 일제 침략자들과 투쟁하였고, 소련공산당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과도 죽음으로 맞서 싸웠소. 그럼에도 여전히 외세에 기댄 사대주의·권력추종자들과 친일세력은 나를 혼란과 파괴를 일삼는 무정부주의자라 폄하하는구려.

내 67세 늙은 나이에 안락한 상해를 떠나 홀로 적지인 만주로 떠나는 이유도 독립은 외세의 힘이 아닌 내 자신의 행동과 헌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오. 많이 갖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에 걸맞은 희생과 모범을 보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가져야 한 사회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후대들은 기억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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