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성을 인정하자
다원성을 인정하자
  • 김영빈(일어일문·4)
  • 승인 2015.05.12 17:02
  • 호수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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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교의 석좌교수인 고은 시인이 수원 시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사람은 유명해야 별 것 아닌 일에도 기사에 실리곤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사를 눌러본다. 기사에는 별 내용은 없다. 시인이 수원 시민이 되었다,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의 내용이 실려 있을 뿐이다. 단지 한 구절이 눈에 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셨으면 좋겠다.”


 한국의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가 번역에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다양한 어휘와 그것이 전해주는 느낌을 외국어로는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했던가. 때문에 우수한 작품이 도처에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태 상을 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변명처럼 들리곤 한다. 정말 번역의 문제뿐일까.


 2년쯤 전에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인기몰이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호평만은 아니었다. 코리건은 그를 두고 ‘김치 냄새 나는 크리넥스’라 비평하기도 했다. 그 표현이 인종 차별적이라는 비판과 논란이 이어졌지만 나는 다른 점에 주목했다. 어쨌거나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작품 자체에 미국과 한국이 동시에 주목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나는 아이처럼 궁금해졌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데에, 그러니까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도 주목을 받은 데에서 번역에 대한 소리는 단 한 줄도 거론된 적이 없다. 미국인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번역이란 것이 큰 장애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된다.


 모든 언어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저마다의 표현이 있다. 한국어만 유달리 표현이 다양하고 능숙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일본어를 전공했으나 한국어로 그를 옮기는 것에 자신이 없다. 일본어로만 가능한 표현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어느 언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은 내용의 문제란 것이다. ‘옮기기 어렵다’는 문제는 모두가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않았는가.


 문학의 성공은 공감과 개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공감할 수 없다면 문학은 이질적인 것이 되고, 개성이 없다면 가치가 없어진다. 한국의 문학이라고 그와 다르진 않을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가 말하는 ‘엄마’가 미국인들의 공감을 샀을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생소한 동양적인 정서, 한국적인 정서가 그들에게 개성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화제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자국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자존감이 없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와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을 세계에 알리고 보편적인 문화로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항시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반드시 우수하다든지 타자는 그 가치를 못 알아본다든지 하는 오만한 자세다.


 사람은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는 법이다. 타자의 시선을 노벨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오만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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