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응의 유훈
이한응의 유훈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5.05.13 21:49
  • 호수 13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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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시아 평화를 위해 죽고자 하오
▲ 1905년 5월 12일 자결직전에 찍은 주영국 서리공사 이한응

화사한 장미와 철쭉꽃이 흐드러진 계절의 여왕 5월 12일은 내 세상을 하직한 날이오. 오늘날 외무고시 준비로 밤잠을 설치는 후대들이여, 내 32살 꽃다운 나이에 님들이 부러워하는 전도양양한 제국의 외교관이었소. 그런데 왜 이 아름다운 계절에 스스로 세상을 등져야 했는지 그 사연을 들려줄까 하오.
나는 1874년 용인 이동면 화산리에 태어나 용인에 묻힌 용인의 토박이오. 세상만사 모두 궁금했던 16세 시절 난 구한말 최초의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해 2년간의 학기를 무사히 마쳤소. 20살 과거길에 올라 한성부주사로 근무하다가 고종황제께서 일본군 몰래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치욕을 눈으로 목격하였소.  
서양문물 수용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황제는 1901년 3월 이 사람을 영국과 벨기에 양국 공사관 참사관에 임명하셨소. 난 민씨척족으로 대외정책을 주관하던 민영돈 공사와 함께 영국 런던에 부임해 열심히 국제무대의 한복판을 뛰어 다녔소. 하지만 이미 청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기 위해 열강들과 밀약을 추진하고 있었소. 즉 일본은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과는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를 서로 묵인해주는 조건으로 밀약을 추진하고 있었소. 더욱이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함대를 선제공격해 전란을 일으켰고, 고종을 겁박해 조선땅을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만들었소.
내 홀로 런던에 남아 후임 서리공사가 되어 한국의 참담한 사정을 열강에 알리려하니 암담하더이다. 매일 영국 외무성을 찾아가 일본과의 동맹조약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일이니 영국이 한국의 주권을 계속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소. 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을 조정하고,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균형자 역할을 맡아주는 것이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역설하였소. 즉 4개국이 서로 평화조약을 맺어 한반도를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가로 이끌어 주면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설득하고 간청도 해보았소.
허나 두차례나 일본과의 동맹을 맺은 영국 정부는 나를 귀찮은 망국 대신으로 여길 뿐이었소. 일본은 나를 강제 소환하라 고종을 협박하였고, 심지어 괴한을 보내 날 죽이려고 하였소. 이에 나는 차라리 목숨을 바쳐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세계의 양심인들에게 고발하기로 마음먹었소. 
110년 전 5월 12일 난 유서 한통 남기고 독약을 마셔 세상을 하직하니, 을사늑약 체결에 맞선 최초의 순국자가 되었소. 21세기 대한의 외교관을 꿈꾸는 젊은이들이여.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미국·중국·러시아의 야욕이 너무나 구한말 정세와 유사해지는 요즈음이오. 나의 한반도 중립화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죽어야 했던 내 참뜻을 널리 알려주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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