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일하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기쁨
백색볼펜. 일하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기쁨
  • 승인 2015.05.15 00:48
  • 호수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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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요즘은, 한 주 한 주 신문사에서 남은 임기를 세어가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가며 X표 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남은 시간을 지워나가며 마지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몇 주 전, 졸업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4학년이 된 것도 실감이 나지 않은데, 졸업이라니? 그런데 웬걸, 모두 취업 준비도 한창이다. 친언니는 취직한지 두 달이 다돼가고, 선배들은 직장생활이 이미 한창이다.
고된 직장생활의 모습이 신문사 생활과 겹쳐 보여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함께 고초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나는 X표를 쳐가며 남은 날이 줄어드는 기쁨으로 견뎌왔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이직을 한다 해도 마지막이 없다. 평생 일해야 한다. 신문사 퇴임 후 휴학을 해서 할 ‘일’을 무한정 계획 세우던 내가, 취업 후에는 ‘일’의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에 지레 겁을 먹었다. 언제 끝이 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버티지?
최근 프리랜서로 전향하신 아버지께서 ‘바쁘다’ 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도 지난 몇 주간 의뢰받으신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그만 할까 생각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아버지는 전도서의 큰 흐름을 다시 생각하셨다. 전도서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자신이 수고해 이뤄놓은 모든 부귀를 죽고 난 이후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물려줄 생각에 ‘헛되고, 헛되니 헛되다’고 말한다. 그러다 솔로몬은 사람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을 때 육체가 부리고 있는 즐거움이라는 겉모습에 숨겨진 권태를 발견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일의 결과와 성취의 기쁨이 아니라, 일 그 자체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다”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석가모니가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을 때 까지 고통을 겪으며 산다고 말한 일체개고(一切皆苦)도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은 ‘개고생’이 아니겠냐 하셨다. 모든 일이 고생이니, 몸은 계속 놀려고 하는데 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권태에 빠지는 것이다.
긍정심리학자도 행복의 요소로 ‘몰입’을 말했다. 개고생인 일 자체를 몰두하고 계속하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니. 그래, ‘3주 남았다’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개고(皆苦)생 하겠다’로 남은기간 마저 행복해보자.

<惠>

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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