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쓴 고난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숙취
백색볼펜. 쓴 고난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숙취
  • 승인 2015.05.19 17:58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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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리
 
주류계의 허니버터칩이라고 불리며 20대를 강타한 ‘처음처럼 순하리,’ 이를 능가한다는 ‘좋은데이 블루베리’, ‘석류’, ‘유자’ 를 보고도 귀한 줄 모르고 빈손으로 올라온 경상도 친구의 말을 들었다. 아, 이런 먹을 복 없는 사이라니. 나만 순하리를 마셔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아쉬운 생각에 좋은데이를 경험해볼 기회도 놓치다니. 사람들이 지난 몇 달간은 과자 한 봉지에, 지난 한 달간은 소주 한 병에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있나 싶다. 달콤함에 속아 순하리를 쭉쭉 마시다, 다음날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났다고 한다. ‘링겔주(매화수+소주)’보다도 ‘후폭풍’이 심하다는 증언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래, 달콤한 건 결국 힘든 거야”라며 마셔보지 못한 나를 위로한다.
같은 정도로 취할 만큼 술을 마신다면, 정말 달콤하거나, 잘 넘어가는 술일 수록 비교적 숙취가 심하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내 몸은 이 논리에 완벽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사실 마실 때는 좀 힘들어도, 깡소주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순하리, 블루베리 소주 등이 술맛도 안 난다고 하니 조금 겁이 나는 건 사실이다. 겁인지, 위로인지, 억지인지. 인생도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하는 상투적인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렇다. 내가 쓰디쓰게 넘긴 것들과, 달콤하게 넘긴 것은 넘어갈 땐 몰랐지만 지나고 나면 당황스럽게 뒤바뀐 결과와 함께 찾아온다.
‘뭔가 쉽다, 간단하다, 그래서 할 수 있고, 힘들지 않다’는 순하리다. 하지만 결코 다음날은 순하지 못하다. 반면, ‘정말 어렵다, 복잡하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힘들다’는 깡소주다. 보드카인가? 어찌됐든 다음날은 맑다.
고작 몇 년 마셔 보았다고 ‘사는 게 다 술 마시는 것과 같다’는 흔해빠진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머리 좀 컸다고 키 큰 줄 아는 격이라 웃기긴 하다. 단순한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T. S 엘리엇은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업무는 결국 복잡하게 얽혀버리기 십상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티브 하겐에 의하면 “선택의 폭이 넓다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뜻밖에도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더 빈번하게 발견된다.” 모두 「프리젠테이션 젠 디자인」의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챕터 속에 인용돼있던 말이다. 디자인을 인생에 비유해 설명해 놓은 이 글에서, 역시 ‘순하리’를 떠올린다. 달콤한 술은 꼬일 대로 꼬인 아침을 맞이하게 하는 것처럼,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결국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자유가 아닌 한계가 있는 업무가 오히려 더 높은 성과를 보이는 것.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자.
제약이 많은 업무, 고난 후엔 ‘보람’이 남는다고만 생각했다. 이는 창의성을 높이고 내 역량을 더 끌어낸다. 달콤함 뒤에 숨겨진 복잡한 숙취, 안일함을 거절한다. 쓴 제약을 받아들이고 더 성장하길 바래본다. 오늘도 나는 ‘독하리-’.
<惠>
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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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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