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경계하라
스스로 경계하라
  • 김영빈 (일어일문·13졸) 동문
  • 승인 2015.05.20 16:57
  • 호수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릴 적엔 SF를 좋아했다. 가타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를 선호했는데, 개중에 소설이 원작인 작품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론 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보았던 것들 대부분이 디스토피아의 도래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면서도, ‘왜’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가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웰즈처럼 외계인의 침공 같은 외적 개입이 있으리란 견해도 있었지만, 인간의 산물이 인간에게 위협을 가한다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리 주장하는 이유가 다른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웰의 ‘1984년’이 묘사하는 사회는 정보가 엄격히 통제되며, 사람들의 삶은 감시되는 곳이다. 사람의 감정까지 제어되는 폐쇄적인 사회가 공포감마저 준다. 반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자극과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건설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회는 향락 덕에 진실과 정신적 탐구가 사라지고 동물적 본능만이 남아 있다.


 현실을 보자. 다행히도 많은 작가들이 예고했던 디스토피아가 아직 다가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성인이 우주선을 타고 오지도 않았고, 로봇이나 프로그램 따위가 자아를 주장하며 인간과 대립하지도 않았으며 세계대전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여전히 국지적 분쟁이나 세계의 불황 같은 문제는 남아있지만, 적어도 인류 전체가 절망할 만큼이나 커다란 재앙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 ‘1984년’은 오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멋진 신세계’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단언할 수 없지는 않은가.


 지금처럼 누구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니는 상황을 보자면, 긍정적인 의미로 소통이 편리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무의미한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이 수단일 때의 정보는 정제되고 압축되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양에 비해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는 정해져 있으니, 필요한 것만을 찾아다니기엔 오히려 어려운 시대가 됐을지도 모른다.


 오웰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 걱정했지만 헉슬리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을 걱정했다. 우리는 클릭이나 터치 몇 번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일구어냈으나 덕분에 정보는 값싸고 넘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고 정보의 홍수 속에 진짜 필요한 것은 가라앉아 버렸다. 헉슬리가 두려워한 ‘멋진 신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였다. 21세기의 인간은 스크린과 전파의 감옥에 스스로 갇히고 만 것은 아닐까.


 기술을 부정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창조물은 본디 인간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충분히 인류애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적어도 한 번쯤은 작금의 ‘멋진 신세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해치게 두어서는 곤란한 법이니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우리를 보다 아름다운 세계로 이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