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 할 것을 되새겨보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되새겨보자
  • 임현종 (법학·4)
  • 승인 2015.05.21 14:54
  • 호수 13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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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후 1년이 안 된 1946년 5월,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던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를 수습했고, 곧 국민장이 치러졌다. 해방 후 좌·우 이념갈등이 한창이던 한반도에서도, 그날만큼은 살아남은 자들과 침묵했던 자들의 속죄의식으로 모두 하나가 됐을 것이다. 삼의사의 유골은 ‘효창공원’에 봉안됐고, 3년 후 경교장에서 암살당한 김구 선생 또한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지난 9월 서울시 용산구의회 의원들은 국회의 효창공원 국립묘지화 입법 추진에 반발하며, 이 법안 발의가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아 불안과 문제만 야기하고 있으니 폐기돼야하며, 이에 더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으로 효창공원의 독립유공자 묘역을 이장하여 통합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냈다. 결의문에는 효창공원으로 인해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 및 지역개발에 많은 제한사항이 있어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돼있다는 언급 또한 들어있었다. 순국선열의 묘지가 땅값과 지역개발 문제로 지역 내에서 천덕꾸러기가 돼 버린 것이다. 효창공원의 수난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계속 돼 왔다. 이곳은 본래 조선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으로 그 이름이 효창원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묘가 이장되고 이후 일본군들의 숙영장소이자 독립군 토벌작전지로 쓰였다. 해방 후 삼의사와 백범 김구, 그리고 임정요인들의 묘지가 들어섰지만,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수난은 계속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있는 순국선열 묘지를 이장하고 그 자리에 효창운동장을 지으려했다. 처음에는 여론과 국회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으나, 몇 해 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유치가 확정되자 결국 효창공원 부지 일부를 확보하고 운동장을 건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한 술 더 떠 골프장을 지으려 했고, 반공탑과 노인회관을 지어 효창공원의 의미를 훼손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효창운동장이라는 명칭은 효창공원을 삼켜버렸고, 그 기능은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실제로 한 방송사의 취재영상을 보면, 등나무 아래 곳곳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이곳에 누구의 묘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필자는 효창공원 부지와 그 주변에 어떠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사는 동네에 국립묘지가 생긴다는 것에 불편한 마음을 표출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인지 의문이 들 뿐이다. 최근 교학사 역사 교과서 관련문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과거사 발언 문제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은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스산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다.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서 유행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역사가 무엇인지 한번쯤 되새겨 보는 것이 순국선열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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