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광의 함성
이홍광의 함성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5.05.21 22:10
  • 호수 13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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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인출신 항일의용군 대장이다
▲ 중국 길림성 신변현에 있는 이홍광 열사 흉상

지금으로부터 꼭 80년전인 1935년 5월 11일은 내가 남만주(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일원에서 일본군의 흉탄을 맞은 날이오. 당시 25살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참모장인 나의 전투소식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국내 조선·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된 바 있소. 에버랜드 근방인 용인 포곡읍 출신인 내가 왜 만주벌판에서 전사했는지 그 사연을 들려주려하오. 
나는 1910년 용인의 유일한 지역성씨인 용인이씨로 임진왜란의 명장 이일 장군의 13대손으로 태어났소. 농사꾼의 아들인 나는 10살 무렵인 1919년 용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일제의 만행을 몸으로 겪었소. 칼을 차고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잘못을 저지른 일본학생보다 이를 야단친 한인학생에게 매를 드는 것을 보고 내선일체론의 실체를 보았소.
16세가 되던 1925년 일제의 압제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못 이겨 할아버지와 일가 모두 중국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를 해야 했소. 하지만 만주전역에도 친일적 중국 지주들의 횡포가 심각했으니, 궁핍한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소. 난 악덕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규합하여 응징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소.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이주한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았소. 이에 나는 할아버지와 부인·어린 자식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한인 청년들 7명과 함께 만주 첫 항일부대인 적위대를 조직하였소. 일본군과 친일지주들을 응징한다는 뜻으로 ‘개잡이대’라 붙힌 이 적위대는 한·중 농민들을 규합해 반석의용군으로 발전하였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 한족인 양정우를 대장으로 파견한 후 남만유격대로, 곧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소.
나는 제1군 독립사의 참모장을 맡았지만, 대부분 조선족인 우리 부대원들은 나를 따라 유하현·환인현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 공격에 선봉에 섰소. 특히 일본군들이 누구도 뚫지 못하는 철벽이라 자랑했던 압록강변의 동흥진을 2시간만에 습격하여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였소. 이 사건으로 만주국 신문에 ‘전례없는 사변’이라 보도되고, 동아·조선일보에도 알려지며 호들갑을 떨더이다. 우리 부대의 국내 진공작전은 1937년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보다 2년 앞선 것이나, 북한에서는 이 사실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선배인 나를 언급도 하지 않고 있소. 
1935년 5월 11일도 부대원 200여 명과 일본 목재소를 습격해 80필을 노획하고 돌아오다 일본군 추격대를 만났소. 동지들은 중상을 입은 나를 신빈현 산속에 몰래 묻었다고 하나, 아직 무덤조차 찾지 못하고 있소. 나의 죽음을 애통해한 중국 모택동 주석은 나를 “성망이 제일 높은 수령”이라 칭송하였고,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한 부대이름을 ‘이홍광지대’라 짓고, 반석현의 조선족 중학교 이름도 ‘홍광중학교’라 지어 교내에 큰 동상까지 세워 주었소. 하지만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공훈을 인정하지 않고 있구려. 비록 몸은 만주땅에 묻혔지만, 내 고향 후배들만큼은 항일 무장투쟁의 참뜻과 내 이름도 제대로 찾아주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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