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1. 대학 서열화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1. 대학 서열화
  • 김선교(철학·3)
  • 승인 2015.09.01 15:09
  • 호수 13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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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서열에서 벗어날 자유

우리는 ‘국숭세단’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단어는 사회 구조적 부조리의 산물이기 이전에 우리 대학 학생들의 실존을 무너뜨리는 불편함이다. 학교 이름이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대학의 정시/수시 배치표는 항상 학생보다 먼저 존재했다. 19살  청소년들은 20대로 진입하기 위해서 서열의 수직선 가운데 한 점(point)이 되기를 강요받을 뿐이다.

개인을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는 ‘대학 서열화’는 교묘하게 반성의 칼날을 피한다. 학문적 성찰을 주도해야 할 지식인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학벌주의의 수혜자인 탓에 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

구조의 부조리함에 대한 비난이 자신들이 서 있는 기반에 의문제기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그들은 갇혀있다. 사르트르(J.-P. Sartre)는 특별히 이러한 지식인들의 상황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탐구는 본질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에 종속된다. 결국 대학 서열화에 대한 문제 제기는 금기로 남게 되고, 가끔씩 등장하는 용기 있는 시도들도 배후에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있다는 해석을 피하지 못한다.

사르트르가 지적한 요점은 간단하다. 어떠한 이론적 탐구도 특정 구조 내에서 이루어지는 한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판의 자세는 미루어 두고 일상에 주목해보자. 일차적인 차원에서 대학서열이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인가. 이는 쉽게 말해 학교 순위의 높고 낮음이 대학생들에게 가장 은밀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장면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한다.

대학서열은 가장 먼저 열등감과 우월감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고등학생 때 한창 외워대던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한서삼”이라는 주문이 지워지지 않고 힘을 발휘하는 탓이다.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의 첫머리가 “단”이라는 글자의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의 여부는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전체의 한 요소로서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의 긴장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며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등감과 우월감의 줄다리기는 구조 전체를 지탱한다. 이러한 사태의 근저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암묵적 동의가 놓여있다. ‘기회균등론’의 허상은 일정한 규칙 아래 치르는 공개시험을 통한 줄 세우기를 정당화한다. 이렇게 전체와 부분은 서로를 가능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으로 성립한다. 상호보완적인 형태가 강화될수록 열등감과 우월감의 반복은 그 자체로 안정감으로,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불편한 안정감으로 경험된다.

이제 대학생이라는 실존이 놓여 있는 문제 상황의 출구가 어렴풋이 보인다. 불편한 안정감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고민하는 와중에 필자는 아감벤(G. Agamben)을 발견했는데, 그의 주장은 아쉬운 대로 하나의 선택지가 아닐까 싶다.
그는 대학서열과 같이 인간을 ‘예속된 주체’로 불러 세우는 모든 체계를 ‘장치’라 이름 한다. 장치는 요소를 그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세워준다. 서열 수직선 안의 한 점으로 스스로를 환원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주체로서의 ‘거세된’ 자유를 획득한다.

아감벤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장치로부터 얻은 자유의 포기를 제안한다. 그것은 수직선 밖에 놓인 ‘무의미한 점 되기’ 외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런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장치가 제공하는 안정감, 구조의 한 요소로 자기의 위치를 규정하는 편리함, 서열의 권력관계가 주는 우월감은 더 이상 없다. 이러한 태도는 대학서열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차라리 ‘적극적인 무관심’에 가깝다. 그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장치가 우리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장치를 망각하는 것이며, 장치는 우리의 망각 앞에 무력해진다” 우리가 대학의 서열에 무관심할 때,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한서삼”이라는 주문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의미한 자유’를 선택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그런 용기를 강요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허무한 답변은 다시 질문을 근본적으로 비틀어 버린다.

도대체 대학 서열화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회의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갈망하는 이유는 가만히 있기에는 꽤나 불편한 까닭이다.


김선교(철학·3)

김선교(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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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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