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의 회한
김원봉의 회한
  •  
  • 승인 2015.09.01 15:12
  • 호수 139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왜 북에서 간첩으로 몰려야했나

나는 일제 침략자들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오. 내 고향 경남 밀양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는 충절의 고장이니, 의열단원들이 유달리 많은 이유이오. 나도 11살 때 일왕 생일축하연에 쓸 일장기를 변소에 집어넣고 학교를 그만둘 정도로 항일기운이 높았소.

서울 중앙학교에 편입한 후 조국독립을 위해 군사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19살 중국으로 떠났소. 그러다 고모부인 황상규를 만나 1919년 6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폭탄제조법을 배웠소. 곧 11월 밤 고향 친구인 윤세주 등 13명과 함께 의열단을 창단하니, ‘정의의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 위함이었소.

의열단은 1920년대에 그야말로 일본제국 수뇌부와 고등경찰들을 벌벌 떨게 했던 ‘불나방들’이었소. 부산과 밀양·종로경찰서를 박살내었고,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나아가 도쿄의 일왕 거처에까지 폭탄을 던졌소. 일본군 육군대장과 귀족들을 비롯해 악질 형사나 밀정들이 우리 단원들이 쏜 정의의 총탄에 쓰러졌소. 또 서울과 도쿄, 만주 단동의 일본군 기관을 동시에 파괴할 작전을 3차례나 실행한 바 있으니, 이런 탓에 내 현상금으로 현 시세 320억이란 거금이 걸린 게지요.

난 암살·파괴공작보다 군대를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해 장개석이 만든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깊은 인연을 쌓았소. 1932년 무렵에는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고, 2년 뒤에는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아 민족혁명당을 만들었소. 1938년에는 한인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총대장으로서 항일전에 참전했소. 이 부대는 나와 김구 선생이 합작해 1942년 만든 광복군의 제1지대로 발전했고, 임시정부에 합류한 난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군무부장을 맡았소.

서안·중경의 광복군이 태항산의 조선의용군과 국내의 건국동맹과 연대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칠 무렵, 핵폭탄이 터져 일제가 급작스레 항복하니 너무 허탈하더이다. 아무튼, 김구 주석과 함께 12월 귀국해 열렬한 환대를 받았소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1946년 말부터 나를 위험인물로 몰더이다. 좌우합작운동을 하던 47년 어느 날 일제 때 독립군 때려잡기로 유명했던 고등경찰 노덕술이 나를 수도경찰청으로 연행해 3일간 각종 고문을 하더이다. 일제 때도 당하지 못한 수모를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에게 당하니 억울해 3일 낮밤을 울었소.

그해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곧 나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지니 부득이 북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소. 평양에서 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남한대표로 선출되었고,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냈소. 하지만 고향에 남은 9남매는 한국전쟁 통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죄다 학살당하고 막내 여동생만 겨우 살아남았다 하오. 나 역시 김일성이 경쟁세력인 남로당파와 연안파·소련파를 제거한 1958년 12월 국제간첩이란 죄목으로 숙청당하였소. 중국공산당의 의형제격인 나와 조선의용군 동지들이 김일성 유일체제 구축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의열단 창단부터 임정 군무부장까지 26년간 목숨 걸고 항일했건만, 남에선 빨갱이로 북에선 국제간첩으로 몰려 산야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구려. 허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실행’한 나의 정신은 57년 만에 <암살>이란 영화가 나를 불러내 주었듯이, 통일한국의 산하에서 더욱 빛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