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의 권력구조
노키즈존의 권력구조
  • 김수민 기자
  • 승인 2015.09.08 13:17
  • 호수 13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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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권력의 전형으로 판옵티콘(Panopticon)을 제시한다. 판옵티콘은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의 감옥으로, 중앙에 어둡고 높은 감시탑이 있고 바깥의 원 둘레에 죄수들의 밝은 방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다. 죄수들은 항상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간수의 시선을 느끼지만 감시탑이 높고 어두워 간수가 정확히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감시를 받는 것처럼 행동하고, 결국 감옥의 규율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일상생활 속 규율들은 마치 판옵티콘의 그것처럼 개인을 규율권력의 가치관에 스스로 종속되도록 길들인다. 가령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라던가 ‘동성애는 옳지 못하다.’ 같은 규율들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거부는 곧 사회 부적응을 의미하고, 결국 개인은 스스로를 교화시키고 규율권력에서 배제된 소수를 부정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정작 규율의 정당성 여부나 소수자들의 입장 같은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옵티콘 사회에서는 규율권력 바깥의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이 다수의 권익보호라는 이유로 ‘인도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노키즈존은 어떤가. 물론 노키즈존 현상은 일부 부모들의 이기적인 행태에서 비롯된 일이기는 하다. 실제로 테이블 위에 똥기저귀를 올려놓고 가거나 우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은 채 수다에만 집중하는 등의 사례가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다. 업주들과 직원, 그리고 다른 이용자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어린아이의 입장을 금지하는 것이 전혀 이해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라는 집단 전체를 일반화시켜 사전 차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노키즈존에 내재하는 문제의 본질은 판옵티콘의 권력구조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노키즈존의 등장은 ‘어린이는 시끄럽고 통제가 불가능한 질서 교란자’라는 담론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지배적인 담론 하에서 어린이는 부정적인 존재로 묘사되며 인격마저 암묵적으로 제한된다. 이것은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와 같은 일종의 어린이 혐오다. 심지어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린이 인권침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모두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적이게도 이들은 일부 한국인 관광객들의 추태로 한국인 출입을 제한한 외국 호텔의 사례에는 맹렬히 반대한다.

노키즈존의 반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이체어 설치, 유모차맘 의식개선캠페인, 관련 법안 제정 등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너무나 손쉽게 소수자를 규정짓고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배제시키는 권력의 구조를 폭로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바로 프레임의 문제다.


허승우(문예창작·3)

김수민 기자
김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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