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2.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내 마음의 몫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2.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내 마음의 몫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09.08 17:03
  • 호수 13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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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직, 프리터여도 괜찮아

1919년 9월, 철강 재벌의 아들 루트비히는 상속을 양도하고 사범대학에 등록한다. 가난한 시골에서 교사의 삶을 살기를 원한 까닭이었다. 가족들은 그러한 그의 결정에 당황했다. 당대 최고의 논리학자 러셀에게 철학으로 인정받은 그가, 고작 아이들이나 가르치며 재능을 낭비하겠다니! 결정을 만류하는 누이에게 루트비히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닫힌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는 사람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폭풍을 마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루트비히 그 자신은 폭풍과 마주하길 원한다는 말이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일화는 우리에게 간략한 교훈을 준다. 언제든 닫힌 창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군들 집안에서 편안히 커피나 마시고 싶어 하지, 구태여 바깥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싶겠는가? 창문 안쪽은 확실히 안락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어디로든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될 것이다. 일보 전진을 위해선 폭풍의 핵심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갈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학부생의 입장에서 갑작스레 그러한 용기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초중고 십이년을 버텨 끝끝내 대학에 들어왔고, 누구나 당연하다는 듯 다음 차례는 취업에 할당하고 있다. 닫힌 회로 속에서 이단자가 되기를 고사하며 살아온 삶이 이십년을 우습게 넘겼다. 이제는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바들을 진정 자신이 원해서 해온 것이라고 착각할 지경이다. 우리는 그처럼 사회장치가 미리 설계해둔 바대로 양산되어 왔다.

그럼에도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낄 수 없다면, 그저 살아온대로 그렇게 계속 살아가도 무방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무언가 잘못되어 감을 느낀다면, 확실히 철학은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외부에서 정해둔 격률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 『논리철학논고』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논리와 수,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던 저자는 돌연 자아와 세계에 관한 문제로 관심을 확장한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세계와 삶은 하나이며, 나는 나의 세계이다. 결국 세계는 나의 세계일뿐이다.

그리하여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유아론(solipsism)은 일정한 가치를 갖게 된다. 주체는 세계 내부에 있으면서 다른 대상들로부터 고립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 한계이다 (논고 5.632)” 따라서 철학적 자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하나의 세계 속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세계가 드러나기 위해 꼭 필요한 지반이다. 그리하여 실재론이 주장하는 모든 객체들은 그것의 존립형식을 주체에게 빚지게 된다. 결국 유아론은 엄격히 관철되었을 경우 실재론(realism)과 합치된다.

물론 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뒤집으면서 유아론 또한 배격하긴 하지만, 청년 시절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입장이 그의 삶의 궤적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떠한 외적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가장 견고한 내적 자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어차피 세계는 ‘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들이 보기엔 위태롭고 아무런 이득도 없는 길, 예컨대 전쟁터의 전방에 배치되길 요구한다든지 (그의 공증인이 ‘경제적 자살’이라고 부른) 재산 양도를 고집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은 분명히 불교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구석이 있다 (애초 그의 철학 전체가 비교불교학의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화엄경의 유명한 사구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一切唯心造)” 그 어떠한 외적·물적 조건이 있기 이전에, 나의 마음이 선행하는 것으로서 먼저 존재한다. 일체 것을 지어내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내 마음의 몫이다. 따라서 같은 환경과 조건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천국도 지옥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돈 좀 못 번다고 해서, 결혼 못하고 혼자 산다고 해서 우리 삶이 비극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초의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소 치는 사람 다니야와 석가불의 일화가 나온다. 다니야는 자신이 가족과 함께 살며 소도 많이 갖고 있는 데에다, 우기를 지낼 준비까지 끝마쳤으니 비가 내려도 거리낄 것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석가불은 자신에겐 비를 막아줄 움막도 없고 소도 갖고 있지 않지만 비가 내려도 거리낄 것 없다고 응수한다. 행복을 위해 외적 풍요만을 찾는 이들에게, 확실히 다니야경 마지막 구절은 걸작일 것이다.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Stn. 34.)”

김성현(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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