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2> 박찬익의 유언
역사고백 <32> 박찬익의 유언
  • 단대신문
  • 승인 2015.09.08 17:05
  • 호수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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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우의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2015년 9월 3일 드디어 중국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기념을 빌미로 천안문광장에 세계의 각국 정상들을 모아 놓고 글로벌 파워를 과시하는구려. 일제 침략으로 중원을 다 빼앗긴 채 서쪽 끝 태항산맥에 웅크리고 있던 중국 지도부가 어느새 러시아를 넘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최강국이 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오. 하긴 61년 전 김일성 주석이 있던 자리를 박근혜 대통령이 대신 차지했으니 국제정세란 국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냉정한 교훈을 보여주는구려.

한때 총칼을 겨누던 원수관계가 오늘날 오누이처럼 보이는 것이 내게 특히 반가운 이유는 백년 전 중국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며 외교통으로 일했던 내 이력 때문이오. 난 개화파들이 혁명을 일으키던 1884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신민회와 대종교에도 참여했지만,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해 항일 무장투쟁가의 길로 접어들었소. 한때 만주군벌들과 교섭해 독립군 무기구입에도 힘썼지만,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키우는 일에 어찌 어려움이 적지 않았겠소.

그러다 일찍이 손문 등 중국혁명가들과 동지가 된 신규식 선생을 만나 외교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의 부사로서 손문의 대총통 취임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소. 그 후 선생의 뒤를 이어 신민부에서 대중국 교섭임무를 전담하게 되었고, 1929년에는 중국국민당 국제부 선전과에서 일하게 되었소. 마침 윤봉길 의거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신하게 되자, 내가 가흥과 항주 등지를 알선하였소. 1933년에 이어 1944년에 가진 김구 주석과 장개석 총통의 역사적인 회담장에도 내가 통역으로 배석했지요. 당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한 9개준승의 폐지와 임시정부 승인, 차관과 활동비의 지급문제 등을 타결하는 일에도 내가 힘을 보태었소.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후 난 중국에 흩어져 있는 400만 한인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기 위해 조직된 주화대표단의 단장을 맡았소. 먼저 중경 임정 식구들을 귀국시킨 후, 관내지역 교포들의 본국 송환을 위해 중국 측과 막후교섭을 벌였소. 또 만주로 가 국·공내전의 상황에서 한인군대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수습일로 1948년 4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소.

마침 김구 선생이 북한 김일성 세력과 만나 남북협상을 한다하기에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에 말려드는 것이라 만류하였소. 또 남한 내의 선거참여를 둘러싼 남-남 갈등이 심해져 선생의 정계은퇴도 건의한 바 있으나, 오히려 젊은 반공청년에게 비참한 최후를 당하니 참담할 따름이오.

내 1949년 3월 9일 밤 실제 세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후손들에게 전하려 하오. “나는 평생을 두고 내가 한 일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난 감투를 쓰고 싶다거나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가져보지 못했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인데, 그걸 누구에게 알리겠으며 알아주기를 바라겠느냐. 나는 기둥이나 대들보라기보다는 남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또한 그것이 없다면 제대로 서기 어려운 주춧돌이 되고 싶었다” 내 평생을 한-중 우의를 다지기 위한 주춧돌이 되었고 이제 그 반석도 놓여졌으니, 후손들이여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고 자유와 우정의 꽃을 피우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주길 바라노라.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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