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33> 홍범도의 눈물
역사고백<33> 홍범도의 눈물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15 17:26
  • 호수 13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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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카자흐스탄에 버려둘 것인가
▲ 1920년대 만주에서 동료에게 서명해 준 '날으는 장군'으로 불린 홍범도

여기는 내 고향 평양에서 시베리아행 기차를 타고 일주일 이상 벌판을 달려야하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중앙공원. 이곳에 나의 묘지와 흉상이 있고, 요즘도 105년 전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내가 벌인 의병전쟁을 주제로 함경도 사투리를 서툴게 쓰는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홍범도 장군>이란 연극을 공연하곤 하오. 어찌 이리 먼 곳에 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알고 싶지 않소?

나는 지체 높은 양반님도, 많이 배운 명문가 출신도 아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소. 내 어미는 날 나은지 7일 만에 돌아가시니 아비가 동냥젖을 먹여 키웠지. 헌데 아비마저 9살 때 잃고 나니 지주집 꼴머슴으로 일했소. 15살에 평양의 친군서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는데, 난폭한 상관을 두들겨 패고 탈영했지. 금강산 절 머슴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다가 한 비구니를 만나 사랑을 하다 살림을 차렸는데, 불량배들 때문에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됐소.

북청일대의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던 중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들이 총기를 빼앗으려 하기에 그때부터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친일파 때려잡는 일에 나섰소. 우여곡절 끝에 아내와 재회했지만, 1908년 나를 귀순시키려는 일본군의 고문으로 아내가 옥중에서 죽고, 큰 아들도 한달 후 함흥수비대와 교전하다 잃고 말았소. 둘째아들도 나를 따라 의병 길로 나섰다가 북만주에서 병들어 죽으니, 어찌 한이 쌓이지 않겠소.

허나 처자식보다 망해가는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장부의 마음은 더욱 급하고 강고해지니, 내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가 대한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이 되었소. 마침내 1920년 6월 우리 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일본헌병소대를 격파하니 일본군 제19사단 1개 대대병력이 우릴 추격해오더이다. 그래 내 이놈들을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5백여명을 섬멸하였소. 또 그해 10월 화룡현 청산리에서 김좌진 부대와 함께 협공해 6백여 일본군을 살상시키니, 이게 오늘날에도 독립군 사상 최대성과로 꼽는 봉오동·청산리 대첩이오.

이듬해 6월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로 집결된 수천여 우리 독립군 부대는 소비에트 적군들의 강제 무장해제조치로 많이 이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소. 게다가 1937년 9월에는 한인들이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스탈린의 의심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17만명이 강제이주 당하는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되었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1930년대부터 러시아와 중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이 내 항일 독립군 활동을 소설로 쓰고 읽고 있다는 사실이며, 1960년대에도 카자흐스탄 교포신문에 꾸준히 연재되었고, 한국에서도 장편소설로도 간행됐다는 것이오. 게다가 러시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 동포들이 나를 소재로 한 연극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꾸준히 공연하여 오늘날 한민족정신을 일깨워주는 교량역할을 한다고 하니, 기특할 따름이오. 허나 아직도 나와 만주, 연해주, 러시아 일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의병과 독립군들에 대한 추모비와 기념공원 하나 없는 한국에서, 나를 머나먼 카자흐스탄 벌판에 버려둔 한국정부에서 어찌 통일대박, 동북아 허브기지를 꿈꾸시려는지 알 길이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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