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학교 욤비토나 교수 : ‘행복한 난민’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광주대학교 욤비토나 교수 : ‘행복한 난민’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윤영빈 기자
  • 승인 2015.09.22 17:59
  • 호수 139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콩고 왕자 출신 난민 욤비토나

 

 

"불행과 행복은 같은 문으로 찾아온다. 현재가 불행하다고해서 멈추지 않기를…"

 

Prologue
김구, 안중근, 윤봉길의 공통점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광복을 위해 힘쓴 독립투사’라는 점이다 하지만 독립투사라는 화려한 타이틀 이면에는 마치 반전과 같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 모두 나라가 어렵던 시절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국제사회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 난민 문제. 하지만 6·25 전쟁 당시 우리 국민 또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았던, 난민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난민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우리의 근현대사와 관련이 깊다. 한편 이처럼 식민 통치를 겪고 다시 일어선 대한민국의 역사와 유사한 인생을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한 부족의 왕자에서 난민으로, 그리고 다시 대학 교수로 일어선 욤비토나(49세) 씨가 그 주인공. 콩고 왕족출신 욤비토나 씨는 콩고 내전을 겪으면서 2002년에 조국을 떠나 망명했고, 이후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그가 망명자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망명자였던 그의 시선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또한, 과연 현대의 대한민국은 과거와 달리 난민 문제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8월 11일 욤비토나 씨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광주대학교에서 그를 만나 난민 문제와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봤다.

 

▶ 한국 사회에서 난민들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난민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도 깊은 관계에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미국, 중국으로 떠난 독립운동가도 난민이었다. 또 6·25 전쟁 당시 한국은 현재의 시리아 난민처럼 세계 각국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는 한국이 그러한 도움에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독립투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난민들을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 걸고 행동한 사람들로 봐줬으면 좋겠다. 나도 이러한 부분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나아가 난민들이 같이 살 수 있는 한국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 망명자와 난민이 같은 단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둘 다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지칭하지만, 조국을 떠난 사유와 처우에 있어선 엄연히 다르다. 우선 ‘망명자’는 정치적·인종적인 이유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며, 이들은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까진 망명한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망명자는 일하는 것조차 불법인 등 여러 가지 제재를 받는다. 반면 ‘난민’의 경우는 다르다.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인도주의적 이유로 조국을 떠난 사유로 인정되기 때문에,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 망명자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열악한 처우로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본인의 경우는 어땠는가.
지원은 없고 생계를 이어가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법노동자로 내몰렸다. 난민으로 인정받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지난해 기준으로 난민 신청자 7천443명 중 39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급박한 상황에서 낯선 나라로 온 망명자들이 요건과 절차를 준수하기란 어렵다.

▶ 망명자로서 겪었던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였나.
한마디로 열린 감옥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이름 아래서 항상 을의 입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차라리 감옥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감옥은 의식주 해결은 물론 병원에도 갈수 있지만, 망명자에겐 그림에 떡이다. 환경뿐만 아니라 의식도 열악하다.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배운 말이 욕이었을 정도다. 어떤 욕은 하도 많이 듣고 어감도 좋아 막연하게 좋은 단어라고 착각하고 사용하기도 했다.

 

▶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 6년간의 세월 중 가장 힘들었던 날을 꼽는다면.
가장 힘들었던 날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잠잘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면 감사해야 했다. 임금 체불은 허다했고 월급 대신 받은 김치를 사장이 없을 때 몰래 버린 적도 있었다. 한국말로 일을 가르쳐서 못 따라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무식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 방송에서는 김치를 잘 먹던데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었나.
냄새도 맛도 이상해서 처음에는 김치를 싫어했다. 하지만 김치를 먹으면 한국 사람들이 잘 먹는다고 좋아했고 그래서 억지로 김치를 먹었다. 또 한국은 어딜 가든 김치가 나와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먹다보니 지금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다.

▶ 아프리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대한민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조국으로 돌아가 콩고를 한국처럼 일으키겠다는 바람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한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언젠가 콩고도 잘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고, 그러기 위해선 한국에 머무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종 목표는 한국의 경제, 교육, 복지 등을 잘 배워 콩고를 살기 좋은 나라로 바꾸는 것이다.

 

▶ 고국인 콩고는 어떤 나라인가.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3번째로 큰 나라로, 한국과 비슷하게 과거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당하다 독립한 역사가 있다. 12개의 다수민족과 20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있고, 넓은 영토에 많은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어 ‘지하자원의 보고’라 불린다. 여기에는 한국과 재미있는 인연이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이 콩고에서 채굴한 우라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콩고에서 적용하기 좋은 한국의 정책이 있는가.
콩고의 현재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마을 운동’을 가장 적용시키고 싶다. 또 한국의 의무교육 시스템도 도입하고 싶다. 국가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 정책인데, 콩고는 돈이 없으면 배울 수가 없어 매우 안타깝다. 인적 자원 하나로 일어선 한국의 이러한 정책들을 지하자원이 풍부한 콩고에 도입한다면, 콩고 또한 한국처럼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반대로 한국이 콩고보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한국은 GDP가 11위인 국가지만, 세계적인 경제 규모만큼 인권의식이 성숙하진 못하다. 또 ‘글로벌 코리아’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국제 사회 문제에는 소극적이다. 인종차별 또한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내 피부색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은 물론, 더럽다고 생각해 악수를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콩고처럼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인종과 나라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한국은 아프리카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미개한 대륙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만 보완된다면 한국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교단에서 바라본 한국 학생들은 어떤지, 또 마지막으로 신문으로 접할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우선 학생들이 대학에 왜 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출석, 학점을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러 학교를 다녔으면 한다. 학생들의 질문을 통해 교수도 새롭게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하고, 학생들은 교수의 가이드를 따라 더 수월하게 학업을 성취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한다. 또한, 불행과 행복은 같은 문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단국대학교 학생들이 대학 생활을 통해 행복이 찾아왔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길 바란다.
      

 

윤영빈 기자
윤영빈 기자

 32122527@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