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 미래의 성장통 갈등의 확장(1)
분쟁 : 미래의 성장통 갈등의 확장(1)
  • 분쟁해결연구센터
  • 승인 2015.11.04 17:37
  • 호수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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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갈등의 이념화, 갈등의 양상을 복잡하게 만들어


민주화가 진행된 80년대 후반 이후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잠재돼있던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면서 사회갈등과 분쟁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등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항상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거에 주목받지 못했던 인권이나 평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국가가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던 시기를 벗어나 개인과 집단의 중요성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갈등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보다는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으로 이어져 사회발전을 억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의 공공갈등은 발생의 원인과는 다른 방향, 특히 이념적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갈등이 이념화될 경우 이슈가 다양해지고 갈등 당사자와 참여자가 증가하여 갈등의 양상이 복잡해지고 해결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갈등의 이념화 현상을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와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993년 10월 10일 승객 230명을 태운 서해페리호가 전북 부안군 임수도 앞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292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목숨을 잃은 이 사고는 세월호 침몰사고와 같이 전형적인 인재로 분류된다. 출항 당시 기상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출발했고, 선박의 정원은 221명이었지만 사고 당시 362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사고의 책임이 정부의 관리감독 소홀에 있다고 주장하며 보상이 아닌 ‘배상’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유가족들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유가족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부가 제시한 배상액(1인당 8천178만원)이 생계유지에 턱없이 부족하다며 반발했고, 사고 이듬해인 1994년 해운항만청과 유가족 대표는 승객 1인당 보상금을 9천910만원으로 하는데 합의했지만 대다수 유가족들이 이에 반발해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998년까지 이어진 소송의 결과 관리 당국이 서해페리호가 정원초과를 일삼아 왔음에도 시정노력을 하지 않았고 안전운항 점검을 선장에 일임한 책임을 인정해 2억에서 4억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한편 세월호의 침몰 원인은 인양작업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복합적인 인재라는 측면에서는 서해페리호와 비슷하다. 사고가 발생할 당시 세월호에는 최대 적재량의 최고 3.7배에 이르는 3천608톤의 화물이 실려 있었고 이 과정에서 선박의 무게중심을 고려하지 않은 점, 무리한 선박 증·개축으로 인해 배의 안전성이 위협 받고 있었다는 점, 사고 당시 경험이 부족한 3등 항해사가 무리한 과속 항행을 한 점 등이 추후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던 사안들이다. 이처럼 사고가 서해페리호 침몰사고와 같은 인재로 밝혀지고 피해자의 상당수가 고등학교 2학년의 어린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비슷한 유형의 해양사고였음에서도 서해페리호 사고와 세월호 침몰사고는 다른 경로를 타게 되었다.


서해페리호 사고의 경우 갈등의 당사자가 유가족과 정부에 한정되어 있었고 갈등의 쟁점 역시 보상금과 손해배상에 관한 문제로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유가족의 가두행진 시위는 있었지만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세월호 사건은 서해페리호 사고나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갈등의 시작부터 이념적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건발생 초기부터 구조과정에서의 난맥상이 드러났고 점차적으로 사전 관리가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졌다. 피해자 가족들로 구성된 대책위뿐만 아니라 안산시민대책위원회 등 복수의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들은 정부에 피해자 가족의 참여 및 투명성이 보장된 진상조사기구의 설립, 긴급지원법의 조속한 제정 등을 요구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추모집회는 사태가 이미 전국화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와도 같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담고 있는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했고 이에 정치권도 이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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