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6. 죽창을 부르짖는 까닭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6. 죽창을 부르짖는 까닭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11.04 19:15
  • 호수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학, 실천의 횃불을 밝히다

대한민국이 지옥이 되었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는 지옥에서 아우성치는 청년들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대변한다. 헬조선과 더불어 ‘죽창’이라는 키워드 또한 유행이다. 무기로 쓸 마땅한 쇠붙이가 없어 대나무를 가져다 썼다는 동학농민군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정말로 죽창을 손에 들고 항거하러 나서지 않는다. 불꽃같은 민중봉기의 상징이었던 죽창은 이제 씁쓸한 자조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지금의 상황은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라고 불렀던 그것의 무기한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점차 청년들이 문제의 근본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식의 신자유주의 성공신화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전통적 신자유주의 모델은 개인의 실패를 순전히 개인의 결함 탓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이들을 ‘노력충’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신화는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우는 안전장치 같은 것이다. 알튀세르를 인용하자면 그러한 성공담의 주인공들은 ‘박물관의 전시품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적 계급의 존재는 전시품의 전시에 의해 은폐된다. 노동자 계급은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도 상위 계급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가능성에 마음을 쏟는다. 그러나 요즘 한국 사회는 그러한 전시품의 생산에 실패하고 있다. 노력이 기대를 배신한지 오래다. “노동자의 엄청난 다수는 종신토록 노동자이다”라는 알튀세르의 언명은 이제 청년층의 피부에 와 닿는 냉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말로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 청년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라져버린 평등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죽창을 부르짖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죽창 앞에 누구나 한 방”이라는 그들의 구호는 죽음 앞의 평등을 역설한 홉스를 떠올리게 한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의 능력에 있어 평등하게 창조했다. 따라서 가장 약한 자라 하더라도 가장 강한 자를 살해할 수 있다. 결국 자연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강자라고 하더라도 폭력적 죽음의 가능성 앞에 몸을 떨어야 한다.
사회법제는 그러한 야만적인 자연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법제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도덕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불법적 행위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 전자는 인간에게 공권력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며, 후자는 인간의 양심으로 하여금 법을 지키는 것이 정직하다고 믿게 한다. 더는 무력시위를 통해 상위계급에 항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단순히 처벌이 두렵기 때문만이 아니다. 내면화된 도덕적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행위를 옭아매고 이내 저지시킨다.

죽창을 부르짖으면서도 죽창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청년들은 지금 여기에서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지 않는다. 그들에겐 막연하게나마 ‘탈조선’을 꿈꾸는 것이 도리어 현실성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떠나려는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비용을 요구한다. 먹고 살 돈이 없어 떠나려는데 이조차 돈을 내라는 악순환. 이것이야말로 탈출구 없는 자본주의 지옥의 맨얼굴이다. 정말로 자본주의 외에 마땅한 체제적 대안이 없다면, 최소한의 모순만이라도 수정할 방도를 모색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청년들의 아우성이 아직은 필사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는가보다.

청년들의 비탄이 점차 분노로 바뀌어가고 있다. 지금 철학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러한 감정의 전환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이유 없는 분노란 없다. 분노는 항상 능동적 결단을 요구한다.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맑스의 테제는 이제 고전이 되었다. 물론 철학 그 자체는 입법에 관여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 정책 수립에 기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문제를 바로 보는 틀을 제공한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라는 문제의식이야말로 실천의 첫걸음이다.

동학운동은 만인이 존귀한데 누군가는 비천하게 대우받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경대전에서 ‘시천주(侍天主)’의 첫 글자에 대해 풀이하길,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다(內有神靈 外有氣化)”고 하였다. 이러한 언명에 따르면 누구나 자기 안에 한울을 모시므로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사회에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청년들을 비정규직과 열정페이로 내몰며 마구 부려먹고 합당한 보수조차 주지 않는다. 지금이야 죽창이 자조의 대상이지만 언제 그것이 다시 거대한 실천의 불길로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과거에 동학이 농민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철학이 청년들에게 등불이 되어줄 때이다.

김성현(철학·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