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6> 김승학의 소망
역사고백 <36> 김승학의 소망
  • 단대신문
  • 승인 2015.11.04 19:19
  • 호수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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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의 역사를 지켜야한다

온 나라가 국정 교과서로 역사전쟁을 벌이는 통에 차마 누워 쉴 수만은 없구려. 효녀 대통령과 충신 의원들이 자신들의 통제 아래 만들어낸 교과서가 갑자기 ‘자학사관’과 ‘종북주의’에 빠졌다며 역사학자들을 좌경으로 몰아세우니, 정통보수파인 나조차도 납득이 안 가는구려. 행여 친일과 독재세력을 미화하고 독립과 민주화의 역사를 없애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내겐 무장 독립투쟁의 피나는 역사가 먼지처럼 사라질까 무섭고 두렵소.

내 1881년 압록강변인 평북 의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서간도를 오갔지요. 위정척사파인 조병준 선생의 문하에서 대의명분을 배웠지만, 20세 무렵에는 서울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소. 허나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 당하자, 나도 저항적인 민족교사로 변하였소.

1910년 홀로 압록강을 건너 동삼성의 강무당에 입학해 무관교육을 받고, 의병과 포수단을 모아 대한독립단을 만들었소. 3·1운동 이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이 되어 서간도 독립단체를 결집시켰지요. 그러다 상해로 파견되어 무기를 구입해 오라는 밀명을 받게 되었소.

난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총기 240정과 탄약을 구입한 후 몰래 서간도로 귀환해 동지들에게 나눠주었소.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니 생명같이 사랑하여 1탄에 왜적 1명씩 잡자”고 연설했던 당시 장면이 눈앞에 선하구려. 이런 무기를 가진 독립군 부대들이 국내로 수차례 진격해 일본군 95명을 사살한 일도 생생하오. 난 또 상해로 파견되어 이광수가 버리고 간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복간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래 1921년 4월부터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5년간 신문을 매주 발행하였소. 또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투쟁사를 가르치기 위해 박은식 선생과 함께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약속하고, 독립운동 사료를 필사적으로 모았지요.
임시정부는 1926년 10월 나를 육군주만참의부의 참의장으로 임명해 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기하라는 임무를 주었소. 곧 참의부와 정의부·신민부 등 3부 지도자들을 모아 통합운동을 주도했지만, 불행이 일제의 체포령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소. 허나 우리는 길림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군사조직인 한국독립군을 창설해 독립전쟁을 이끌었소.

1929년 11월 통합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소. 일본 경찰들은 무엇보다 내게 ‘그 많은 독립운동사 자료를 어디에 숨겼는가’를 집요하게 문초하더이다. 내가 모은 자료는 내몽고 포두에 보관하여 끝내 지켜냈지만, 손발이 요절되는 집요한 고문과 조사는 나를 병들게 했소. 겨우 5년만에 출옥하여 곧장 만주로 가 맡겨둔 독립운동 사료를 찾은 것은 그만큼 그 사료들이 장차 독립군과 미래 역사학자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소.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책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지만, 내겐 평생 숙원인 독립운동사 편찬의 일이 시급하였소. 미군정 통치의 혼란한 상황에서 광복군 국내 2지대 설립과 독립신문 속간의 책임도 내게 주어졌지만, 가장 심혈을 쏟은 일은 독립운동사 편찬이었소. 그 결과 1964년 마침내 『독립운동사』를 탈고하여 겨우 후세에 남기게 되었소. 허나 나는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소. 나의 소망이며 한민족의 숙원이니, 부디 세계사에 길이 빛날 50년 항일 무장투쟁의 자랑찬 역사를 잘 지키고 후대에 가르쳐 주길 바라오.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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