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7.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단상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7.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단상
  • 김선교(철학·3)
  • 승인 2015.11.10 17:27
  • 호수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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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하고 항구적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그렇게 텅 빈 것이었다. 그저 여기저기에 떠돌아다니던 무의미한 기호에 불과했다. 국회의원 연금법을 통과시키며 그들만의 자유를 지켜내고, 규제를 완화하며 경제활동의 자유를 수호하더니, 역사교육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쉽게 ‘자유’를 빼버릴 수 있는 것일까. 권력 앞에서 자유는 하릴없이 고개를 숙였다. 보수 집권당과 정부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선언함으로써 이제까지 그들이 칭송하던 자유가 얼마나 공허한 가치였는가를 증명했다.

지난 3일 국무총리는 기존 검인정 체제를 실패로 규정하며 북한 관련 기술과 집필진의 좌편향성, 대입 과정의 효율화 등 7가지의 논거를 제시했다. 같은 날 야당의 모 국회의원은 반박문을 즉시 발표하였다. 하지만 교과서의 세부적인 내용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그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기에 매우 소모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를 비롯한 국정화 찬성 세력이 논란의 프레임을 효과적으로 설정했다.) 사태의 본질은 기존의 자유경쟁체제를 실패로 낙인찍으며 국정화를 밀어붙인 보수 세력의 자기모순적인 행태 자체에 놓여있다.

정부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기존의 검정교과서 제도는 자유시장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교과서의 집필자들이 공급자라면, 역사 교사들과 학생들은 소비자이다. 다양한 역사 교과서들이 시장에 공급되면 역사 교사들과 학생들이 소비자로서의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검인정 체제의 핵심이다. 발행된 총 8종의 교과서들 중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7종의 교과서들은 자유로운 경쟁 가운데 살아남은 ‘상품’들이다. 한 종류의 교과서가 채택되지 못한 것을 시장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공급의 경쟁자가 없거나 적어서 발생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유일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교과서가 소비자의 외면을 받은 것이 정부로서는 유감이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보수 세력, 즉 여당과 정부가 국정화를 추진하는 작금의 상황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자유로운 경쟁의 미덕 자체를 말살해버리는 정책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고 있는 몇몇의 나라들이 이를 방증한다.

자유시장주의의 한계를 정부가 일정 부분 인정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도 어렵다. 하필 역사 교육과 관련해서만 개입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유’는 권력의 자기방어 기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 사태는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사고체계 속에 매우 정합적인 논리를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 정부가 꾸준히 기조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의 거장 하이에크(F. Hayek)는 자신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직접적으로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주는 역사·법·경제학에서 진리에 대한 탐색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교리를 가르치고 출판할지 당국이 결정한다.”(『노예의 길』 中) 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역사학자인 카(E. H. Carr)마저도 "역사책을 읽기 위해서는 역사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역사가가 누구인지 알려면 역사가를 낳은 사회를 알아야 한다"(『역사란 무엇인가』 中)라는 말을 통해 단일하고 항구적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었다.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진 두 학자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와 역사의 문제를 고민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칸트(I. Kant)에 따르면 정치는 인간의 외적인 자유의 영역이며, 도덕은 내적인 자유의 실현이다. 역사는 두 종류의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즉,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성취되는 자유의 정신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다. 이때 개인과 전체의 이성이 발휘되는 의사소통의 자유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칸트의 역사철학』 中) 현재 정부의 모습은 자유와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는 확정되었다. 자유를 저버린 자들이 기술한 ‘올바른’ 역사는 믿을 수 없다. 분노를 넘어 허무감이 밀려오는 이때에, 특별히 대학생들은 시민적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교과서를 직접 사용하지도 않으며, 구태의연한 이념 논쟁에도 덜 물들었기 때문이다. ‘중간자적’ 위치에서 누리는 자유가 사유와 실천으로 진정한 자유에 대한 물음에 천착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김선교(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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