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7> 장형의 당부
역사고백 <37> 장형의 당부
  • 단대신문
  • 승인 2015.11.10 17:37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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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단국대학을 세운 이유는
▲ 1947년 무렵의 장형 선생

11월 3일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차별교육에 맞서 일어선 광주학생들의 의거일인 동시에 단국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이요.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으로 역사학자와 교사, 지식인들, 어린 학생들조차 거리시위로 나서는 상황에 생일상을 편히 받을 처지가 아닌 듯하오. 더욱이 단국대학이 현존 200개 대학 중 독립운동가인 설립자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독립운동사를 정규 강좌로 가르치는 유일한 대학이라하니, 내 지난 삶의 흔적과 당부가 어느 때보다 값진 교훈이 될 것이라 믿소.
내 본명은 장세담이오, 평안남도 용천에서 1889년 1월 태어났소. 스무살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공부했는데,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조선의 민족교육을 막고 학교 운영권을 장악하려 했지요. 그래 우리 전교생이 모두 항거해 자퇴를 감행하니, 그해 단 한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지요.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민족지사를 대량검거하려 하자, 난 가족도 만나지 못한 채 만주로 떠나야 했소. 그때 스승인 손병희 선생께 작별인사를 갔는데,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자금조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시며 나에게 그 일을 맡으라 당부하시니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었소. 그날 이후로 난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일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달려갔소. 또 조선 국내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로 인솔해 입교시키는 일도 맡았지요. 그때 얻은 별명이 ‘남선북마 독립군’이니, 중국 남부에서부터 만주 벌판까지 안 가본 데 없이 다 돌아다녔다는 뜻이지요.

내 독립자금 모집활동은 1916년부터 20년 동안 중국과 만주, 국내 전역에서 이루어졌소. 난 강연회를 명분으로 조선 팔도를 순회하며 청중들에게 성금을 모집하기도 했고, 한의학 침구술을 배워 부자들에게 거금을 받기도 했소. 그러다 일본 경찰이 나를 유사의료행위를 했다며 구속시켜 1년간 감옥생활도 했지요.

1927년 중국 길림으로 간 나는 이주한인들을 위해 수전개발 사업도 해보았소. 그러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는데, 난 정미소를 운영하며 비밀리에 군자금 모집하는 일을 계속하였소. 내가 모은 자금은 임시정부의 이시영 재무총장을 비롯해 만주 독립군 부대에 전달되었는데, 이런 일로 일제가 정미소를 불사르기도 했지요.

난 반석현에서 해방을 맞았소. 다행이 중국군 소장 출신으로 파견된 김홍일 장군을 만나 무사히 귀국하였고, 임정의 김구 주석과 신익희 외교부장이 민족학교인 국민대학을 설립한다기에 성심껏 도왔지요. 허나 1947년 7월 신익희 학장이 김구 주석과 결별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에 합류하니, 내 그를 찾아가 크게 싸운 후 임정의 전통을 계승하는 새로운 대학을 만들기로 결심했소.


그래 조희재 여사가 기부한 땅과 내 땅을 팔아 자금을 만들고, 민족사학자인 장도빈·안재홍 선생을 모셨소. 그 분들 말씀이, 이념으로 갈라진 남북한을 다시 통일시키려면 한민족 시조인 단군의 건국사상과 애국정신으로 민족동질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셨고 이를 지향하는 뜻으로 학교이름을 ‘단국’으로 지어 주셨소.

단국대학은 명실공히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배우고 가르치는 대학이어야 하오. 내가 애초에 법학과 역사학 등 5개 학과를 우선 만들고, 교수들께 독립운동사를 꼭 가르치라 당부하는 것은 독립정신을 헤아리지 못하는 교육은 목적이 없는 활동과 같기 때문이오. 나아가 단국대 창학의 정신을 새겨 널리 민족통일의 기둥이 되어주길 당부 드리는 바이오.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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