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순국선열의 날 되새겨 보는 설립자 범정 장형 선생의 정신
특별기획 | 순국선열의 날 되새겨 보는 설립자 범정 장형 선생의 정신
  • 김아람 기자
  • 승인 2015.11.17 15:47
  • 호수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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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의 설립은 독립운동 정신이 바탕”
▲ 단국대학 학생들과 범정 장형 선생, 김구 선생이 함께 한 사진

17일은 제76주년 순국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이란, 일제로부터 국권을 박탈한 시기에서 광복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의사, 열사 등의 독립운동가를 일컫는 말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정부에서 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이토록 뜻 깊은 날을 맞아 해방 후 최초로 설립된 정규 4년제 사립대학인 우리 대학의 역사와 뿌리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학의 정체성에 대해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끼고, 설립정신을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 우리 대학 설립자 범정 장형 선생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
우리 대학의 설립자인 장형 선생(이하 장형)은 독립운동가였다. 장형이 대학을 설립하고자 고군분투한 이유와 이것이 현시대에 시사하고 있는 점은 무엇일까.
장형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더는 가만히 앉아 학업에 몰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장형은 그 길로 대표적 항일 단체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학교까지 자퇴하고 구국운동에 매진하던 장형의 활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1912년 일본 경찰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해 신민회 회원을 대거 체포, 고문한 ‘105인 사건’ 때문이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장형은 만주로 망명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 이후에도 장형은 임시정부 이시영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한다. 수차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겪어도 그칠 줄 모르는 의지였다.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947년 설립된 단체인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김구와 함께 운영하고, ‘전국통일학생총연맹’의 직접지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해방 후에도 장형은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 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계몽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독립기념관 경내에 있는 장형 선생 어록비

#단국대학의 설립 정신
장형은 백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학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아야 하고, 하나로 모으기 위해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정점으로 해야 한다며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이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다.
우리 대학 설립은 △분단의 민족적 실책 반성 △청년 양성 △독립운동의 동지를 규합해 완전한 자주독립 달성 의 포부에서 비롯됐다. 즉, 우리 대학의 설립정신을 한마디로 ‘독립정신’이라고 함축해 표현할 수 있겠다. ‘애국(愛國)’, ‘애족(愛族)’의 정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도전과 창조의 정신. 이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음 깊이 함양하고 계승해야 할 정신임이 분명하다.

참고 서적: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과 단국대학 설립』
자문: 박성순(교양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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