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8> 정정산의 선언
역사고백 <38> 정정산의 선언
  • 단대신문
  • 승인 2015.11.17 20:03
  • 호수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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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대 독립운동가의 며느리이다
▲ 시아버지에 이어 남편과 두 딸, 사위와 본인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본인도 독립군을 도와 ‘만주의 어머니’로 불렸던 정정산 여사

흔히 세상을 한탄할 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파 집은 3대가 흥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의병이나 만주 독립군, 의열단 하신 분들이 집안일 보다 일제와 싸우느라 그 자식손자들을 돌보지 못해 대를 이어 가난과 무식함을 벗어나지 못했고,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잘살게 된 친일파들은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부귀영화에 권좌까지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내가 그 3대가 망한다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이니, 정말 그 말이 옳은 말인지 판단해 보시구려.
난 용인 이동면 태생으로 14살 어린 나이에 이웃마을 17살 소년 오광선에게 시집을 갔소. 시아버지인 오인수는 명포수로 유명했는데, 항일의병장으로 참전하다가 악질 친일파 송병준의 일진회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어 자식 혼인식에도 오시질 못했지요. 집안 어른 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먹으려니 언제나 쪼들려 살았지요.

아버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독립군이 되리라 결심했던 어린 남편은 민족지도자 여준 선생이 세운 삼악학교에 다니다 서울로 유학길을 떠났소. 종로에 있던 상동청년학원인데, 이회영 선생이 만든 학교이고 그가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러 망명하자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지요. 남편도 1917년 가족을 두고 홀로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지요.

2년 뒤 고대하던 남편에게서 편지가 오더니 압록강 넘어 서간도 합니하에 무관학교가 있으니 오라는 전갈이지요. 난 출옥한 시아버지를 모시고 간단한 살림도구만 챙겨 기차를 타고 명죽리에서 내려 걸어서 한달만에 만주로 어렵게 들어갔지요.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서 짧지만 행복했던 신혼의 단꿈을 꾸었지요. 남편은 조선을 광복시키자는 뜻의 광선으로 개명한 후 독립군 중대장과 대대장 등을 맡으며 청산리와 봉오동전투를 비롯한 각종 전투에 참전했지요.

남편은 1921년 6월 대한독립군의 최대비극인 흑하사변으로 큰 곤경에 빠졌어요. 공산 러시아군의 사주로 같은 동포들끼리 총질을 하는 바람에 500명 이상이 죽고, 남편과 장교 84명이 러시아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어렵게 남편이 탈출해 얼어붙은 바이칼호수를 맨발로 걸어 북만주 김좌진 장군에게 참상을 알려 겨우 남은 동지들이 풀려나게 되었지요.

그 후 남편과 우리 가족은 북만주 액목현으로 옮겨 독립군 학교를 세우고 생활했어요. 그곳에서 딸 둘을 낳고 남경으로 이주하다 아들을 낳아 길렀어요. 하루에 12가마씩 밥을 지어 독립군들을 먹이니, 날더러 만주 어머니라 불렀어요. 그러다 김구 선생의 부름을 받아 남경으로 내려오니, 임시정부 가족들과 같이 피난살이를 했지요. 이 무렵 북경에서 비밀공작사업을 하던 남편이 일제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어요.

그 사이 어린 3남매는 임정식구들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잘 자라 주었고, 어느덧 큰 딸 희옥은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며 광복군에 자원입대하고 둘째 딸도 공작대에 참여했어요. 게다가 큰 딸이 광복군 비서장과 혼인을 하니 주례는 김구 선생이 맡아 해주셨죠. 일제가 패망했다 하여 임정식구들과 함께 귀국을 했는데, 다행이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와 꿈에 그리던 상봉을 하게 됐지요. 그래 시아버지를 비롯해 남편과 두 딸, 내 사위와 나까지 독립유공자로 수훈을 받으니 3대 독립운동가문이란 명예를 얻게 되었지요. 50년에 걸쳐 온 집안식구들이 일제와 싸워 이긴 우리 집안의 얘기,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자랑스런 일 아니겠소?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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