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토록 소수를 거리로 내모는가
무엇이 이토록 소수를 거리로 내모는가
  • 승인 2015.11.24 15:41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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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문화

◇ 과거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인간사회를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벽만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에 비유했다. 어느 날 바깥세상의 햇빛(이데아)을 보고 온 현자가 이들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려 호소하지만, 그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새 동굴 속 죄수들 사이에서 다수의 무지 현상이 만연해진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후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타락한 정치라고 맹렬히 비난하게 된다. 무지한 ‘다수’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소수’의 현자. 더 나아가 그는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엘리트주의와 철인통치를 주장한다. 다수를 계몽시킬 수 있는, 그 사회에서 가장 이성적인 철인들이 통치하는 국가가 곧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향이었다.


◇ 지난 14일에 광화문 광장 앞에서 민중총궐기가 열렸다. 민중총궐기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필두로 지자체, 청년단체들이 연대해 개최한 집회 시위다. 이들은 대표적으로 현 정권의 △노동정책(노동개혁, 청년실업) △국정 역사교과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소홀 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모였다.


이를 두고 불법시위니, 폭력시위니, 부상자와 체포자는 총 몇 명이니, 정치색깔이 어떻다느니 등 매스컴과 여론에서 논란이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이 논란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단 한 가지, ‘무엇’을 위해 시민들이 이토록 소란스러운 행사를 열었냐는 거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수많은 요구안은 모두 ‘민생안정’으로 수렴된다. 사회적 약자에게 불어 닥친 부당한 노동/근로환경, 인권무시, 빈곤 등 우리 사회가 묵인했던 어두운 벽면에 크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사회적 ‘소수’들이, 민주사회가 무색하게 무뎌진 ‘다수’의 문제의식을 깨워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자고 제안한 셈이다.


◇ 이쯤 되니 플라톤의 『국가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물론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했지만 그 본질은 결국 다수의 무지와 침묵에 대한 경계였다. 절반 이상의 죄수들이 깜깜한 동굴에서 벗어나 햇빛이란 이데아로 나아가자고 소리쳤다면, 플라톤은 분명 동굴 속 민주사회를 이상적으로 여겼을 것이다.


민중총궐기를 대표로 내세웠지만 그 외 대학사회의 시위문화 또한 예전 같지 않은 점도 더불어 지적하고 싶다. 언제부턴가 시위참여는 곧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는 행위로 읽혀져, 껄끄럽고 피하게 되는 행사로 낙인 찍혔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퇴색됐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은 사회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침묵은 금이 아닌 독이다. 정의를 위한 투쟁을 껄끄러워하는 순간, 당신은 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는 무지한 다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眉>

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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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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