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9. 실존주의-강의실을 박차고 나갈 권리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9. 실존주의-강의실을 박차고 나갈 권리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11.25 00:43
  • 호수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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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적으로 살 것인가, 철학적으로 살 것인가

관성처럼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가. ‘지금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단순한 물음은 진지하게 사유되었을 때 우리의 단조로운 세계에 폭풍을 몰고 온다. 대학생이라면 으레 그렇듯 성실하게 출석하고 학점을 채워 학위증을 받아야 할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더는 존재치 않는다면 어떡해야 하나. 물음의 출현과 함께 삶에 대한 모든 기계적 태도는 힘을 잃는다. 당연시되어온 모든 게 낯선 모습으로 다가올 때, 실존적 사유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물론 실존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곧장 실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장 예외적 행동에 가해질 처벌이 발목을 잡는다. 예컨대 결석이 쌓이면 F를 받고, 학사경고를 받고, 최종적으로는 학교에서 쫓겨날 것이다. 이처럼 충분히 상상 가능한 처벌의 두려움이야말로 제도가 개인에게 순응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실존적 인간은 제도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삶의 진짜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무의미에 불과하다. 권장할만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삶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여태껏 개인들은 사회장치가 만들어낸 허깨비를 좇아왔으나, 허깨비를 걷어내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특수성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란 실상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최종적으론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부터 시작하는 실존주의 사상의 계보는 모두 동일하게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실존주의적 인간이란 끝내 죽음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그러나 이 같은 패배는 그가 선택한 결과이다. 카뮈(A. Camus)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카뮈의 ‘부조리(Absurdity)’란 앞서 묘사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더는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밀려오는 무엇이다. 부조리야말로 오직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이자, 오직 인간 삶의 꽁무니만을 계속해서 뒤쫓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 밖으로 벗어나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게 세계는 영원히 불가해한 것, 곧 부조리한 것으로 남을 것이고, 그래서 누군가는 더 이상 밀어닥치는 삶의 무의미와 허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뮈에 따르면 실존주의자는 결코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 실존주의자는 그에게 내정된 ‘죽음’이라는 숙명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그럼에도 당장의 ‘삶’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모든 기회와 자유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실존주의자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과 함께 부조리를 살려두면서, 그것에 대해 끝까지 반항해야 한다. 여기서 반항은 매 순간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 철학적 태도를 뜻한다.

사회 장치와 그 제도만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존,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 세계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조리하다. 어째서 우리 각자가 누군가의 아들딸로 태어나 삶을 연명해야 하는지 이유를 물으면 도대체 알 도리가 없다. 정말 뜬금없이 우리는 세계 속에 던져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죽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시한부 인생이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삶이란 것을 줬다 뺏어가니 이토록 억울한 노릇이 따로 없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자는 자신이 내던져져 있다는 ‘피투성(Geworfenheit)’을 차가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리 토를 달아봤자 회피할 수 없다. 죽음과 그 귀결인 무(無)를 당연한 것으로 포착할 때 역설적이게도 당장의 삶에 대한 긍정이 가능해진다. 어차피 닥쳐올 미래에 마음 쏟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으로 현재를 살아낼 뿐이다.

처음 그 물음으로 되돌아가자. 매번 똑같이 강의실로 직행하는 것이 진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될 수 있는지, 그저 제도권 내로 편입되기 위해 무의미한 몸짓을 반복해온 건 아니었는지, 우리는 이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생긴다면 당장 강의실을 박차고 나오라. 물론 사회제도는 당신의 그러한 돌출행동을 변호해주지 않을 것이다. 강의 듣지 않을 권리는 순전히 ‘실존적 권리’에 불과할 뿐이니까.

박차고 나와서 진정 자신이 탐구하고 싶은 것을 탐구하라. 그것은 곧 니체의 교육학이 설파하는 방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교육과 탐구가 세속을 지향하는 한 ‘교양인은 교양의 가장 큰 원수’에 그칠 뿐이다. 학위나 직함은 우리 삶을 따라다니는 부차적인 꼬리표, 수사적 요소에 불과하다. 고작 수사에 집착하여 지적 양심을 포기할 것인가. 니체가 찬탄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는 어떤 시적인 또는 수사학적인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 수사학적인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철학적인 삶을 살 것이냐?

김성현(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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