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리브로! 20. 독서란 교양을 길러주는 유일한 수단이며 대학은 곧 독서공동체여야 한다
비바, 리브로! 20. 독서란 교양을 길러주는 유일한 수단이며 대학은 곧 독서공동체여야 한다
  • 단대신문
  • 승인 2015.12.01 16:36
  • 호수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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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이제 연재를 마쳐야 할 시간이 왔다. 처음 이 연재를 만든 데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재밌으면서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이 많으니 책을 읽자’는 것이다. 이미 고전이 된 책들은 그래서 열외로 했다.
 

그리고 최신간 베스트셀러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거니와 의외로 언론의 힘이 독서계에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삶을 바꿀 정도는 아니고 약간의 교양을 늘려줄 책, 그리고 어렵지 않게 읽어낼 책들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봐야 19권이다. 한 학기에 10회를 내는 단대신문의 한계로 1학기와 2학기를 통 틀어 써도 소개할 책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딱 천자의 글로 소개 글을 써야 하는 지면의 제약으로 재밌는 일화나 저자 소개 등을 제대로 못하는 답답함에 시달렸다. 물론 그런  갈증은 필자의 무능이 빚어낸 일이다. 거기에 천학(淺學)이 겹쳐 과연 소개한 책들이 기획의도를 해치고 독자들에게 어지럼을 줬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사실 독서라는 말은 고리타분한 말이다.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독서라는 어려운 행위는 네이버와 구글의 검색이라는 수단으로 대체할 정도가 되었다. 즐거움으로써 독서 역시 인터넷, 스마트 폰을 기반으로 한 오락과 게임들로 갈아치워졌다. 그렇다면 독서란 이미 태양에 노출된 드라큘라처럼 곧 망각의 관에 들어갈 구시대의 유물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독서는 사실 지식이나 지적 쾌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장 큰 가치는 교양이다. 교양이란 무엇일까? 가끔 지식이 교양과 같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교양과 지식은 다르다. 지식은 목표를 달성하거나 과제를 풀어갈 방법을 뜻한다.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지도를 보는 법은 지식이다. 그렇다면 왜 내가 산에, 그것도 정상에 올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또 지도제작자로서 창업을 할 때 내가 만들 산악지도의 존재목적, 차별성을 어떻게 생각해낼 것인가? 그 관점, 철학, 가치관이 바로 교양이다.
 

지식은 얼마든지 전수할 수 있다. 때로는 잊기도 한다. 되찾고, 재정리하여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교양은 그렇지 못한다. 교양은 전수하거나 기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 ‘형성’한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왜 내가 특정한 회사에 입사해야 하는지, 평생 그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인간으로서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신념을 가진 사람을 왜 존중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는 지식으로 풀 수 없다. 그것은 교양의 영역이다. 그래서 교양은 ‘휴머니즘’로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아갈 때 가져야 할 가치, 신념, 실천력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의 총집합은 결국 교양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양은 내면에서 길러지는 것이고, 형성시켜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이를 어디서 배울 수 있고, 살 수 있겠는가. 오로지 독서를 통한 토론과 사색, 성찰로써 얻어지는 가치이다. 
 

그러고 보면 대학이란 바로 책 읽고, 글로 논평하고, 입으로 토론하는 것이 전부인 곳 아닌가? 결국 대학이야 말로 최선의 ‘독서공동체’인 셈인데, 어떤가? 독자들은 그렇게 살고 계신가? 우리 대학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교양 있는 대학’인가?
 

김남필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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