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40> 신채호의 바람
역사고백<40> 신채호의 바람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2.01 17:02
  • 호수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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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의 이름으로 청년에게 고하노라
▲ 조선민족사 연구와 민족전선 결성에 정열을 쏟은 단재 신채호 선생

2015년이 한달도 남지 않은 세계는 언제 찾아들지 모를 테러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고, 한국은 일본군이 또다시 이 땅을 넘볼 기회만 엿보는데도 여전히 철지난 이념논쟁에 빠져 있구려. 역사란 자기견해와 관점에 선 아와 그렇지 않은 비아의 투쟁이라 내 갈파했거늘, 정치·군사로는 미국의 눈치를, 경제적 이익으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는 사대의 습성은 여전하니 딱하기 그지없소.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 의한 권력자를 위한 역사책이 쓰여지려는 야만의 시대에 내 민족사학의 이름으로 청년들에게 눈물로 고하고자 하노라.

난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9살 때부터 자치통감을 배우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1894년 이곳으로 피신 온 갑오농민군을 보고 한국역사의 험난함을 절감하였소. 19살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과 신학문을 배우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지만,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니 박사자리를 사임하고 황성신문사에서 항일논설을 썼지요. 그 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일하면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등 우리역사 속 영웅들을 저술하며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앞장섰소.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1910년 4월 난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 권을 몸에 품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해외 독립지사들을 규합하였소. 북경대학 도서관에 들어가 중국통사를 죄다 읽으며 사대와 식민사관에 찌든 민족사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진정 독립국이 되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소.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져 이에 참여했지만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이 빼앗긴 나라조차 미국에 위임하자는 청원을 하기에 내 이를 격렬히 반대하며 북경으로 와 성토문을 쓰고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였소. 또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류자명이 찾아와 선언문을 부탁하길래, 한 달 동안 그들의 비밀조직을 살펴본 후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소. 이 선언문을 통해 강도 일본의 침략논리는 물론 이승만의 외교노선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혔고, 민중에 의한 직접행동만이 자주독립과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이라 설파하였소.

이후 우리 민족사를 지키는 역사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각오로 저술에 전념했소. 이 무렵 『조선사연구초』란 책을 펴내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에 맞섰소.

난 향후 독립운동과 새나라 건설의 방향은 패권적 권위주의나 공산당에 의한 계급독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국제주의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이회영·류자명 동지들과 함께 아나키즘에 공명하였소. 그래서 1926년부터 중국과 대만·베트남·인도 동지들과 함께 일제와 코민테른에 맞서는 동방아나키스트동맹의 한국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나의 선언문이 대회에 채택되기도 했소. 대만동지와 함께 외국환을 위조해 인출하려했던 저 유명한 국제위폐사건은 국제아나키스트들의 연대활동을 위한 내 평소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오.

내 비록 그 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 받아 뤼순의 차디찬 감방에 갇히고 말았지만, 조선사 원고를 국내에 꾸준히 게재하도록 하고 자전 차입을 요청한 것은 역사전쟁에서 결코 패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오. 또 민족전선을 결성해 전면적 항일전쟁을 촉구한 것도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떳떳한 미래를 꾀하고자 함이었소. 내 평생 자랑찬 민족사학의 정립에 목숨 걸고 힘써 싸워왔으니, 청년들이여 나를 딛고 일어나 부디 동아시아 평화의 전사가 되어 주길 눈물로 호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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