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41> 3·1 운동 탑골공원
역사고백 <41> 3·1 운동 탑골공원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리스트
  • 승인 2016.03.08 20:22
  • 호수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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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탑골공원에서 목 놓아 소리치다
▲ 3·1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기초한 만해 한용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음식점 태화관(泰和館)에 모인 우리 종교지도자 33명은 이 떨리는 역사적 선언문을 낭독하였소. 나에게 인사말을 부탁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앞으로 협심해 조선독립을 기도하자”는 말을 하고, 모두 일어나 “대한 독립만세”를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지요.  

그날 파고다(현 탑골)공원에서 기다리던 수많은 학생 시민들은 우리가 잡히자 나름대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돌입했지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학생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 모두 전율했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지요. 이날 이후 서울·경기 일원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되어 5월 말까지 전국 모든 지역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니, 2천 건수가 넘고 2백만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소. 

▲ 1931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파고다공원 현장모습. 가운데 중학생 소년이 후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박헌영이라 한다.

사실 국내 거사는 내가 맡았지만, 해외에서의 만세운동은 국상 전에 북경으로 망명한 이회영이 기획하였소. 그의 노력으로 인해 중국 북간도의 용정촌과 서간도 일대를 비롯해 러시아 연해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소. 죽음을 무릅쓴 우리의 만세항쟁은 세계 피압박민족 동지들을 감동시켰으니, 중국 근대화의 시초인 5·4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의 간디와 이집트 자글룰 파샤의 독립항쟁에 불을 지폈지요. 

2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풀려났지만, 난 일부 민족대표들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소. 수많은 희생자, 동지들의 친일전향, 얼어붙은 식민지 현실, 그럼에도 끝내 쟁취해야 할 독립의 정신을 난 시집 《님의 침묵》에 담았지요. 이후에도 난 좌익과 우익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에 신간회의 서울지회장, 그리고 비밀조직 만당의 당수로 활동했지요. 내 창씨개명에도 반대하고 조선인 학병과 위안부 출정에도 반대하다 광복을 1년 앞두고 눈을 감고 말았소. 

허나 남북한 핵전쟁 위협이 감돌고 미·일-중·러 강대국이 침탈을 노리는 오늘날 그날 내가 지은 공약 3장을 다시 한 번 목 놓아 외치고자 하노라.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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