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42> 명성황후 참변 121년
역사고백<42> 명성황후 참변 121년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리스트
  • 승인 2016.03.23 09:26
  • 호수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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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장충단에서 통한의 눈물 흘리다

나는 조선의 국모요. 이름은 민자영으로 시호는 명성황후이나, 나를 미워하는 이들은 여전히 민비라 부르고 싶어하지요. 조선 망국의 주역 중 하나인 여흥민씨 권문세가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친인척이 별로 없어 어미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소. 외척의 정치관여를 무척이나 경계했던 대원군의 눈에 들어 16살에 왕비로 간택되었으나, 아들대신 전권을 갖고 척양척사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시아버지에 맞서 부득이 정계와 외교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요.

1882년 임오군란으로 피난 갔을 때 시아버지는 왕비인 내가 죽었다며 국장까지 치르려 했지요. 이때부터 난 부군인 고종이 친정할 것을 권하고 러시아와 미국·유럽열강의 문물을 들여오는 개화세력을 이끌게 됐지요. 이런 나를 두고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일본에 반대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친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여인”이라 격찬했지요. 심지어 나를 미워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동양의 호걸’·‘여장부’라 평한 바 있지요.

나의 불행과 조선의 비극은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청국과 함께 출병하고 서울 경복궁을 무단 점령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에 의해 시작되었소. 사실상 국왕과 나를 포로로 삼은 일본군은 청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뤼순까지 점령하였소. 나는 서둘러 러시아 베베르공사와 독일·프랑스 정부를 움직여 3국간섭을 일으키니, 일본은 부득이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됐지요.

러시아를 움직여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나의 계획에 가장 분개해하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미우라 주한공사는 드디어 살인청부업자들을 동원해 나를 제거하기로 작정했지요. ‘여우사냥’이란 치욕적인 작전명으로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으로 침입한 일본 낭인들은 나를 지키려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비롯해 숱한 경호병과 궁녀들을 죽이고 건청궁까지 난입해 나를 시해하고 말았소. 심지어 내 시신마저 불사르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니 얼마나 비통하리오. 나의 심경은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 <명성황후>와 2009년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잘 담아주었더이다.

내 원한을 풀어주려는 부군 고종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웠소. 내 죽은 지 2년만인 1897년 시호를 명성으로 바꿔주시더니 10월 드디어 대한제국을 건립해 나를 황후로 추존해 주셨소. 그리고 나와 함께 참변을 맞은 순국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서울 중구 장충동에 제단(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을 만들어 주셨지요. ‘널리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의 장충단 세 글자는 고종황제가 직접 쓰셨고, 비 뒷면의 143자는 충정공 민영환이 쓰셨소. 황제는 이곳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시니, 군악이 연주되고 조총을 올려주었지요.

허나 이미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니 장충단에서의 제사도 1908년에 중단되고 말았소. 더욱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되자, 일제는 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를 그 자리에 만들었소. 그 절은 경복궁의 전각과 경희궁의 문을 떼어 옮겨와 지으니, 얼마나 큰 치욕을 내게 준 것이오. 해방 후 이곳에 안중근의 위해가 대신 모셔진 것은 다행한 일이나, 그 자리에 새로 세워진 신라호텔엔 오늘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숙박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소.

이 장충단공원에는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일제에 맞서 최초로 순국한 이한응 영국공사의 기념비와 네덜란드 헤이그에 고종께서 파견한 이준열사의 동상, 1919년 파리에 독립장서를 보낸 유림들을 기린 비석 등이 있어 나를 외롭지 않게 하고 있소. 내 참변을 맞은 지 121년이 지났지만, 또다시 일본 자위대의 한국 파병설이 들리니 통한을 거둘 길 없소. 청년들이여, 장충단에 오거든 봄 바람결에 묻어나는 내 눈물을 기억해주기 바라오. 

 

기자 답사체험 후기 

#1 눈길 닿는 곳마다 아픔이 서려 있었다. 발 밟는 곳마다 그 옛날 고통의 비명이 치솟았다. 망가진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잘못과 허물로 뭉친 관계에서 비롯된 피해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는 어쭙잖은 변명만 내어놓을 것인가. 장충단 추모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비석의 글씨가 눈물로 얼룩졌다. 울분의 역사를 그대로 입증하듯 일제 강점기 때 소실된 이후, 초라한 모습만 남아 스산한 기운마저 뿜어냈다. 

달라져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장충단을 중심으로 주변에 뻗어있는 여러 동상은 형태는 있으나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은연중에 잊힌 우리의 역사가 울고 있지는 않은가.

박다희 기자 

 

#2 장충단공원과 그 주변은 대한민국 근대 역사가 깊이 스며든 동네였다. 넓지 않은 공원 안에 비석 여럿과 돌다리 수포교가 있었고, 공연 뒷길과 이어진 남산 아래를 오르니 각각의 개성을 지닌 탑들도 마주칠 수 있었다.

당시 국민들이 정권에 불신을 가지지 않도록 세운 탑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개선거를 진행했던 장충체육관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역사유적을 모르고 지나쳤을까’하는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장충단 일대는 올해 ‘장충단 호국의 길’로 지정됐다. 12개의 주요 기념물을 소개한 국방저널 3월 호 화보와 모바일 앱을 지참한다면 더욱 즐거운 답사가 될 것이다.

설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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