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43> 효창공원에 잠든 문화대국 전설
역사고백<43> 효창공원에 잠든 문화대국 전설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리스트
  • 승인 2016.03.29 16:27
  • 호수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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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효창원에서 육삼정 의거를 회상하다

지금으로부터 83년 전인 1933년 3월 17일 밤 9시경. 일본 침략자들을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흑색공포단 소속 아나키스트인 나와 원심창, 이강훈 세 사람은 상해 일본조계지인 무창로의 중국요리집 송강춘의 문을 열고 들어섰지요. 당시 우리는 1년 전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적장들을 참살시킨 바 있는 도시락 형 폭탄과 수류탄 각 1발, 휴대권총 2자루와 실탄 15발로 무장하고 있었소. 일본인 동지인 야타베 무우지는 거사장소인 한 블럭 앞 일식요리점 육삼정 앞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가 나타나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했지요.

우리는 이 거사를 약 보름간 준비해왔소. 일본대학 출신이며 우리 단의 서기부 책임자인 원심창의 첩보에 의하면, 일본정부의 밀명을 받은 아리요시 주중공사가 2천만 달러 상당의 비밀자금을 갖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각료들을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도록 교섭하려고 이 곳 육삼정에 모인다는 것이오. 이에 의열단 참모장 출신의 남화연맹 의장 류자명과 흑색공포단 책임자인 정화암 동지가 나와 쟁쟁한 단원 8명을 불러 모아 의견을 물었지요. 헌데 단원들 모두 자신들이 이 죽음의 거사를 실행하겠다고 자청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하게 됐지요. 다행히 1년 전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기회를 빼앗긴 내가 당첨이 되었고, 후일 광복회장이 되는 이강훈과 원심창 동지가 나와 동행하게 되었지요.

우린 다음날부터 아키라공사의 사진을 구하고, 놈이 타고 갈 차량의 번호와 연회장소 위치 등을 면밀히 알아내었소. 이어 거사현장이 될 육삼정을 직접 답사하며 작전계획을 짰지요. 먼저 놈이 연회를 끝내고 나와 차에 오르면 정문과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져 경호원과 놈을 처치하고, 실패하거나 저항이 있을 경우 권총으로 확인사살한 후 도주하기로 하였소. 물론 우리가 잡히거나 총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상해와 북경, 남경 등 중국 각 신문사에 우리의 거사목적을 담은 선언문이 뿌려질 예정이었소. 우린 몇 차례 실전 예행연습을 했으며, 거사 당일 저녁 11명이 모여 송별회도 가졌지요. 난 류자명 의장께 “저승에서 만납시다”라며 작별인사를 나눴지요.

이런 치밀한 준비와 비장한 각오를 갖고 우린 마침내 그날 9시경 송강춘의 문을 열었던 것이지요. 허나 잠시 후 어디서 대기했는지, 상해 일본영사관 형사들과 경찰대 수십여 명이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와 우리 3명을 모두 체포하고 말았소. 상해 곳곳에 숨겨놓은 친일 밀정들이 우리의 계획을 몰래 엿듣고 밀고하여 체포조를  대기해 두었으니, 원통하기 짝이 없소. 이것이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함께 해외 3대의거라 일컬어지는 육삼정 의거의 전모요. 우린 비록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계획대로 중국 각 신문에 우리의 거사계획이 대서특필되었소. 이로써 장개석과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하려 벌인 추악한 밀약이 폭로되어 일제공작을 막는 데 성공하였지요.

나가사키재판소는 주동자인 나와 원심창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는 15년형을 선고했지요. 나는 재판장에게 “우리는 정당한 행동을 하다 죽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나키스트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소리쳤지요. 원심창과 이강훈 동지는 일제가 패망한 1945년 10월 10일 출옥하였지만, 폐결핵을 앓고 있던 난 1년만인 1934년 6월 5일 적국의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내 나이 39세의 일이오. 다행히 형무소 야산에 버려졌던 나의 유해는 환국한 김구 선생과 재일동포들이 찾아내어 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잘 안장해 주셨소. 청년들이여, 백범과 임정 동지들이 묻힌 효창공원 오거들랑 ‘문화대국 건설’이란 그 분들의 간절한 소원을 기억해 주고, 내 무덤 위엔 꽃 한 송이 꽂아주길 바라오.    

 

● 기자 답사 후기

#1 효창원에 발을 딛자 곳곳에 전시된 애국열사의 기록이 눈에 띈다. 조국의 얼을 담은 그들의 이야기가 공원 가득히 서려 있다. 차디찬 비석에 딱딱한 서체로 적힌 역사에서 아픈 과거의 쓰디씀이 느껴지는 듯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 입구, 한 치의 오차 없이 각지고 높은 계단들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다. 김구 선생의 일생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후대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 일생을 바치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일어나야 한다. 김구 선생이 바랐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 조국은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생의 삶과 사상을 본받아 겨레의 문화적 삶을 이룩해야 할 때이다.    

전경환 기자

 

#2 사적 330호로 지정된 효창공원에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둘러보는 이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제야 왔을까, 왜 이제야 알았을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타계하신 김구 선생. 백범기념관에서 교육활동, 독립운동, 의열투쟁, 군사활동, 통일운동 등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김구 선생의 행적을 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조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애국열사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2016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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