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45> 부통령 이시영
역사고백<45> 부통령 이시영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리스트
  • 승인 2016.05.03 20:47
  • 호수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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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과 독재 척결의 깃발을 들다
▲ ▲ 서울 수유리 4.19국립묘지 뒤편에 자리한 묘소. 후손 없는 광복군 18위 합동묘소가 그 앞을 지키고 있다.

‘4월은 잔인한 달 5월은 혁명의 달’이라 일컫지만, 내겐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한 이날이 더 값지고 눈물겹소. 단군 역사 이래 처음으로 거대한 국가권력이 민초 앞에 무릎 꿇은 날, 백성이 처음으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지낸 내가 어찌 ‘국부’라 일컬어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독부’라 부르고 독재 타도를 외쳤는지, 내 심경을 고하려 하오.

내 태어난 집안은 조선의 대표적인 삼한갑족인 경주 이 씨로 이조판서를 지낸 부친 아래 6형제이니 이회영이 바로 위형님이요, 장인은 갑오개혁을 주도한 총리대신 김홍집 대감이오. 고종황제는 외척인 나를 수석참의로 가까이 두시다가 1894년 청일전쟁 때 관전사로 전장에 보내시니, 3개월간 냉혹한 국제정세를 목격했소. 그러다 국망을 당하여 그해 12월 31일 6형제 60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니, 이를 일컬어 지금껏 백세청풍이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 하더이다.

이회영 형님과 협의하여 베이징으로 간 나는 고종황제를 망명시킬 준비를 하였소. 허나 1919년 고종이 급사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8인위원회에서 활동했지요. 법무총장으로 임시헌장을 만들었고, 이후 재무총장이 되어 임정 살림을 맡았지요. 허나 대통령 이승만이 외교활동을 이유로 공채를 발행하며 재정권을 장악하고, 국무총리 이동휘와의 노선갈등을 빚어 활동을 제대로 못하였소. 게다가 미국에 위임통치하게 하자는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하자, 나도 물러났지요. 1930년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보호할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며 난 다시 항일운동 일선에 나섰소.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 일가는 고난의 피난길을 떠나야 했지요. 상해를 떠나 항주-남경-장사-유주-계림에 이어 1940년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소. 70세가 넘은 나이에  재무장으로서 임정의 곳간지기를 맡았소. 1942년 좌우합작 정부가 구성되어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되었지만, 후원금은 적고 들어갈 군비는 많으니 고민이 얼마나 많았겠소. 

일제가 패망하여 35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니, 함께 망명한 6형제 중 나만 살아 돌아와 눈물이 앞을 가리더이다. 허나 미군과 소련군이 나눠 점령한 조국은 신탁통치 찬성이냐 반대냐로 갈라졌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김구가 대립하였소. 

숱한 번민 끝에 과도기나마 남한만이라도 우선 총선거를 실시한 다음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입장으로, 또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 정부수립에 참여하기로 했소.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부통령 취임을 수락하였지만, 임정출신들의 중용을 수차례 요청하였소. 허나 대통령은 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친일파를 중용하니 갈등이 많았지요. 

기어코 1950년 6월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지자, 난 공산침략군을 물리치고 국민역량을 모으자고 호소하였소. 허나 이미 반공을 무기로 장기집권에 눈이 먼 이승만정권은 한강대교를 폭파시키고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일으켰소. 게다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횡령으로 병사들이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국방장관이 조사를 방해하자, 크게 실망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나 책임을 지려했소. <국민에게 고함>이란 퇴임사는 민생을 돌보지 않고 정권안보에만 혈안이 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것이오. 

나아가 현 정권의 부패와 불의를 맞고자 1952년 7월 2대 대통령에 출마하고자 후보로 나섰지요. 불행히도 선거에서 패하였고, 이듬해 4월 17일 85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소. 허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되찾고, 독재 권력과 싸워 민주주의와 자립경제를 세우려는 나의 염원은 4월 혁명으로, 6월 항쟁으로, 또 2016년 4월 총선에서 엄숙한 민의의 심판으로 되살아났다고 자위하는 바이오. 

 

# 기자답사 후기

“애국 열사들의 숭고함, 권리 위한 투쟁으로 물들다”

하늘과 닿을 듯 높게 솟은 혁명 기념탑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애국 열사들의 올곧은 의지를 보여준다. 묘소를 감싸는 북한산자락은 모진 핍박에도 온몸을 바친 그들의 영을 위로하는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공간인데, 역사를 마주한 순간 희생의 가치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해마다 4월이면 거리로 나가 싸웠던 정의의 함성이 들린다. 숭고한 열정이 세월에 퇴색되지 않도록 묵념으로라도 경의를 표하는 것이 어떨까.

윤영빈·김태희·이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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