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어주는 기자<6>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고전 읽어주는 기자<6>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설태인 기자
  • 승인 2016.05.10 17:53
  • 호수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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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타인 복제를 넘어 나만의 고유성을 드러내자

“‘무엇’은 예술만이 포괄할 수 있으며, 예술만이 적절한 자기 고유의 수단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31p,『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떠올려보자. 허리를 굽혀 누군가 떨구고 돌아간 이삭을 줍는 데 여념이 없는 세 여인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다. 발밑의 풀과 흙부터 등 뒤로 보이는 건초더미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그려낸 화가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칸딘스키가 이 책을 펴낸 19세기의 미술사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 시대였다. 예술가는 현재를 뛰어넘은 과거나 미래 모습을 재현할 수 없기에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만을 모사해야 한다는 사고가 통용된 것이다.

그러나 코닥(Kodak)사의 등장은 회화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제 무언가를 모방하는 일은 투박한 붓터치를 거친 회화보다 사진이 훨씬 훌륭히 해낼 수 있었다. 회화가 사진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갖춰야만 했던 시대에서, 칸딘스키는 원본을 모사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원숭이가 책 읽는 인간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할지라도 그것이 별다른 가치를 갖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책을 통해 이것은 ‘정신이 결여된 예술’이라고 밝힌다.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신이란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좋은 작품이란 예술가의 감정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형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술가는 캔버스 위에 여러 빛깔의 감정을 칠해나가고, 우리는 작품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예술가와 교류한다. 반면 감정의 표현보단 왜곡 없는 정밀묘사에 집중하는 사실주의 작품들은 카메라가 대신할 수 있는 한낱 손재주일 뿐이다.

‘무엇을’ 표현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재현할 것이냐에 몰두하는 사실주의 화가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 대학생의 모습과 닮아있다. 교수의 말이 한 장의 사진이라면 학생들은 그것을 그대로 베끼면서 최소한의 오차를 겨루는 화가와 같다. 대학생 A씨는 “시험에서 A+를 받기 위해 교수의 우스갯소리까지 받아 적고 외운다”고 말했고, B씨 또한 창의적인 답변을 배제하며 공부한 뒤에야 우등생이 될 수 있었다.

결국 학문 탐구의 장인 대학에서 ‘원본-복사하기’식의 공부는 학생 내면의 성장을 돕지 않는다. 남의 생각만을 옮겨 적는 행위에선 손의 근육만 바삐 움직일 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학문을 이해하려는 비판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공부의 과정에서 수업내용을 ‘어떻게’ 복사하느냐가 아닌,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지에 집중해야 한다. 칸딘스키가 예술작품에서 감정과 형식의 조화를 꿈꿨듯, 시험을 위한 지식의 복사를 넘어 나만의 방식으로 학문을 소화하는 ‘진정한 배움의 길’을 걷는 것은 어떨까.

 

▲ 저자 바실리 칸딘스키

책이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출판사 열화당

출판일 2000. 6. 1.

페이지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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