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47> 이을규·정규 형제
역사고백 <47> 이을규·정규 형제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24 15:30
  • 호수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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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자유공동체 세상을 꿈꾸다

2016년 5월 오늘도 서울 대학로에는 자신의 밝은 미래와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벅찬 발걸음을 재촉하는구려. 93년 전 일본 경찰들과 장렬한 교전 끝에 순국한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있는 이곳에서 나와 중형 이을규의 벅찬 꿈도 키웠으니, 우리 형제의 숨겨둔 꿈 이야기를 들려주려하오.

▲ ‘한국의 크로포트킨’이라 일컬어지는 이을규

갑오동란이 일어난 1894년 형님에 이어 3년 후 내가 경기도 부천 장봉도에서 태어났소. 우리 일가 중에는 실학의 선구자인 이익·이가환 선생과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자인 이승훈도 있으니, 분명 실사구시 가풍이 충만했던 것 같소. 형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천실업학교를 마친 후 은행에 취직을 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차별에 반발하다가 둘 다 사직을 하고 말았지요.

이후 난 일본 도쿄로 건너가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소. 당시 자유분방했던 도쿄 대학가에서 신학문과 자유평등사상에 눈을 뜬 나는 한인 유학생회의 통합을 위해 뛰어다녔고, 이런 노력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결성되어 2·8독립선언대회를 연 일은 지금도 가슴이 뛰오. 국내에도 3·1운동이 일어나 귀국해보니, 형님이 이미 중국 단동에 무역회사를 차리고 고종의 5째 아들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고 있더이다. 형님은 그 일로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는데, 출옥 후 나와 몇 동지를 데리고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지요. 

▲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하며 국민문화연구소를 설립한 이정규 박사

나와 형님은 북경에서 원로 선배인 이회영 선생 집에 오래 머물었는데, 이무렵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북경대 교수인 루쉰 형제, 맹인시인 에르셍코 등과 교류했어요. 특히 채원배 총장은 나를 북경대 경제학부에 편입하도록 도와주셨고, 이를 계기로 난 중국 전역에서 온 청년지사들과 사귀게 되었지요. 호남성 동정호 인근의 광대한 농지에 한인들을 이주시켜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독립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나 복건성 천주에 농촌자위조직을 건설하자는 토론도 이 무렵 익어갔지요.

이회영 선생은 우리 형제와 의열단 류자명 선생 등을 모아 첫 아나키스트단체를 만들고 《정의공보》란 기관지를 발간했어요. 우린 외세의존적인 타협론이나 소련에 의존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행동노선을 주창했지요. 이후 어른의 지시로 상해로 내려간 나는 중국국민당이 추진하는 노동대학 설립에 참여했고, 천주의 민단 편련처운동에, 그리고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이 모여 만든 동방아나키스트연맹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어요. 그러다 1928년 10월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3년형을 살았어요.

이 무렵 형님은 북만주 해림으로 가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어요. 신민부는 그동안의 권위적인 중앙조직 대신 농민들의 자위자치조직으로 변모하고자 한족총연합회로 전환했는데, 이를 불안하게 여긴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김좌진 장군이 안타깝게 살해당하고 검거 선풍이 일어나 형님이 체포되어 5년이나 투옥되고 말았지요. 겨우 1934년에 풀려났는데, 일제는 또다시 우리를 비밀조직사건으로 몰아 4년간 감옥에 쳐 넣었으니, 나라 없는 설움이 뼈 속에 사무치더이다. 

해방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나와 형님은 자유·평등의 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하였고, 노동자·농민이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했지요. 그리고 독립지사 김창숙 선생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대학에 출강하였고, 곧 내게 부총장이란 중책이 맡겨졌소. 난 이승만 독재 권력에 반대한 전국교수단의 시국선언 발표와 시위를 이끄는 일도 했지요. 

대학로에서 시작된 나의 꿈은 1963년 제7대 성균관대학 총장을 맡으면서 더 커졌어요. 난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믿음으로 젊은 학생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떠났고, 청년과 농민들이 연합하는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도 만들었지요. 평생 자주독립과 자유평등사회, 노동자 농민이 잘사는 공동체사회를 꿈꾸고 이를 온몸으로 실천해온 형님은 1972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나도 1984년 88세로 이승을 떴어요. 내 생전 독립유공자 신청도 안 하고 전 재산을 국민문화연구소에 기증하여 집안에 남은 건 별로 없지만, 지금도 대학로에 자리한 연구소에 젊은이들이 찾아와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니 우리 형제가 남긴 씨앗이 결코 헛되지는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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