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48> 조봉암
역사고백 <48> 조봉암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31 20:41
  • 호수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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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여 나를 밟고 일어서라

4·13총선거가 한참 지났음에도 대한민국의 청와대와 국회는 여전히 민심을 모으고 민생을 돌보기보다는 힘겨루기와 차기 대권후보 줄서기에만 열중하는구려.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 산업이 무너져 노동자·상공인들이 대거 실직하고 청년과 여성이 취업난과 치안불안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데도 집안싸움만 일삼으니, 대한민국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 선배가 부끄럽소. 

내 20~40대 청춘은 조직 활동과 도피, 투옥 등 정통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소. 강화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일을 멋모르고 돕다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지요.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투옥되니, 어느새 일제와 싸우는 애국투사가 되더이다.

난 일본 도쿄로 가 주오(중앙)대학 정경과에 입학하였고, 유학생들을 모아 흑도회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에 기울어 북성회에 가담하였소. 북성회는 나를 러시아 극동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대회에 파견하였고 그곳에서 2년간 공부하였소. 귀국해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을 만드니 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소. 이후 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원동부 대표로,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상해 등지에서 조국독립과 세계혁명을 위해 일하였소. 그러다 1932년 9월 상해에서 일본밀정에게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7년간 투옥되고 말았소.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난 전향하지 않고 1939년 출옥한 후 인천의 한 노동조합에서 조합장으로 일하였소. 허나 1945년 1월 일제는 나를 다시 체포하여 해방 전까지 8개월 동안 구금하였소. 

47세 나이로 해방을 맞은 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경기도 대표로서 건국 작업에 나섰소. 허나 내 청춘을 바쳐 활동한 조선공산당이 점차 극좌노선을 걸으며 인민의 삶보다는 소련의 지령으로 끌려가니 크게 실망하였소. 결국 난 동지였던 박헌영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형식으로 반공산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사상전환을 하였소. 성명서에서 조선공산당이 ‘민족의 독립과 국제적 평화를 위해서라기보다 소련의 이익과 정책을 위해’ 움직이고, ‘오직 공산당이 독재정권을 잡는다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는’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지요. 

▲ 조봉암 묘소의 입구에 세워진 어록비

공산주의와 자본독재 반대, 진보적 민족주의의 실현을 위한 내 두 번째 삶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참여로 시작되었소. 1948년 5·10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난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에 시달려온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지요. 8개월의 짧은 재직이었지만, 난 국민 80%에 이르는 농민들의 절박한 염원이었던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소. 다행히 북한이 남침하기 전인 1950년 4월 농지개혁이 착수되어 경기·충청권의 농민들이 소작농에서 벗어나 내 땅을 갖게 되어 남로당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소.

이후 난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소. 그리고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195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말았소. 1956년 평화통일과 자유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진보당을 만들어 창당위원장이 되었지만, 이를 두려워한 이승만 독재정권은 나와 진보당원들을 북한과 밀통했다며 간첩죄를 적용해 체포하였소. 기어이 정권은 1958년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더니만, 5개월 만에 서둘러 처형하니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이 아닐 수 없소. 

간첩죄에 대한 누명은 52년만인 2011년 1월 무죄로 벗겨졌으니 늦게나마 역사정의가 실현된 것이지요. 내 비록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묻혀있지만, 평화통일과 노동자·농민 등 서민을 위한 민주정치 실현의 꿈은 후배들에게 이어지리라 믿소. 대한의 젊은이들이여, 나를 밟고 일어나 진보적 민주정치의 새 세상을 펼쳐주시기 바라오. 

 

<기자 답사 후기> 

#1 김수민 기자

망우산 일대 조성된 서울의 유일한 묘지 ‘망우리묘지공원’을 방문했다. 이곳은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돼 조봉암, 한용운, 오세창,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 조봉암 선생의 연보비에 쓰인 말이 심금을 울렸다. “우리가 독립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산책과 등산의 명소이지만,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문화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답사지다. 묘역에 묻힌 사람들의 삶을 통해 사색을 할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2 이시은 기자

‘망우리묘지공원’은 역사적 의미를 증명하듯 찾는 이들이 많다. 어린아이부터 어른, 외국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곳임에도 묘비는 대부분 한자로만 쓰여 있고 구체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답사지 곳곳에 위치한 묘비의 안내도가 설치됐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묘비를 찾은 후에도 조봉암 선생 묘비에는 그가 정치가 이전에 독립운동가라는 점이 기술돼 있지 않았다. ‘사법살인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 뒤늦게 해명됐지만 주목해주는 이가 충분치 않다면 무슨 의미일까’ 싶어 마음이 먹먹했다. 근현대를 장식한 애국자들의 투혼을 기리는 곳에 걸맞게 묘지공원 관리에 조금 더 힘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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