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49> 최남선
역사고백 <49> 최남선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06 14:03
  • 호수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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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를 버리고 학업을 택한 변절자의 변명

역대 최악의 무더위에 노고가 자심하셨줄 아오. 게다가 8월 초 1만3천여 회원을 가진 문인협회에서 느닷없이 나 육당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다 10일 만에 백지화하고,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계기로 집권여당에서 건국절을 제정하려는 법안을 발의해 해묵은 역사전쟁을 벌이려하니 얼마나 열불이 나시오. 내 국론분열을 일으킨 역사의 한 죄인으로서 후세에 경계가 될 한마디를 전하려 하오.

▲ 1945년 무렵의 최남선

난 서울 인왕산에서 무역업으로 재산을 모은 부모 밑에서 귀하게 자랐소. 12세부터 ‘황성신문’에 논설을 투고하고 3개월만에 일본어를 익혀 황실유학생으로 뽑히니 다들 신동이라 불렀지요. 17살에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 지리역사과에 입학하니 그곳에서 천재 이광수와 홍명희와 깊이 교유했소. 19세에 월간지 ‘소년’을 창간해 저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을 발표하니 오늘날에도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20살 나이에 시들어가는 민족문화를 중흥시키겠다는 뜻을 세워 조선광문회를 설립하고, 주시경 선생과 함께 조선어 사전과 옛 고전을 간행해 이른 명성을 얻었소. 이런 필력으로 마침내 1919년 3월 내게 역사적인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영광이 주어졌소. 이 일로 서대문감옥에서 2년 6개월형을 복역하였지만, 내 생애 민족을 위해 일한 가장 빛나던 시절인 것 같소.

 

▲ 용인 모현면 천주교공원묘원에 자리한 최남선의 묘와 기념비석

출옥 후 보천교의 후원을 받아 ‘시대일보’를 창간해 편집국장을 맡았고, ‘동아일보’에도 사설을 쓰며 필봉을 날렸지요. 이 무렵 만주벌판과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며 단군조선과 민족고유문화를 연구하니, 나의 명저 『불함문화론』에 집약하였소. 단군신화가 동북아시아 문명의 시작이며, 조선과 만주·일본인은 같은 뿌리이니 협력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박은식·신채호의 민족사학에 맞서 만든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조선사 37권에 잘 녹아져 있소.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택일 중 민족의 기대를 뿌리치고 학업을 붙잡으며 변절한 내 죄악의 시작이지요.


이후 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민족고유문화의 계승이란 ‘암우’에 집착해 일제가 부여한 각종 박물관 위원과 고적보물천연기념물 보존위원, 역사교과서 편정위원 등을 감사히 수용하였소. 게다가 1938년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만주국이 세운 건국대학의 교수로, ‘만몽일보’ 고문으로 각종 부와 명예를 얻었지요. 태평양전쟁기에 총독부는 내게 조선 유학생들을 학병에 자원하도록 강연해 달라기에, 군사기술을 배워 향후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역군이 되라고 역설한 기억이 있소.


나 만주와 동남아시아를 넘어 태평양을 건널 줄 알았던 일본의 패기는 내 예상보다 너무 일찍 끝나버렸고, 내 불함문화론은 일제의 내선일체론을 보강해 주는 꼴이 되고 말았소. 민족문화 발양이란 명분으로 지조를 버린 나의 변절은 민족의 분노를 사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기소되기에 이르렀소. 오직 공손히 민족정기의 처단에 모든 것을 맡겨 죗값을 치러 국민께 사죄를 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으니, 후인들은 내 부끄러운 전철을 경계로 삼아 지조를 지켜주길 바랄 뿐이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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