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산책
  • 이승준(철학·2·휴학)
  • 승인 2016.09.19 13:24
  • 호수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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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치듯이 밤 산책에 나섰다. 계절이라는 놈은 지나가기는 하는 건지, 몇 달간의 여름에 멀미가 났다. 10분 정도 걷자, 왼쪽으로 등산로를 마주대고 있는 울타리 길이 나왔다. 10분을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이곳은 밤 같지 않다. 점멸하는 가로등은 주변을 회색조로 물들인다. 발밑에는 검붉게 칠해진 자전거용 도로의 아스팔트가 보인다.

토요일 늦은 밤의 산책로가 회색에 덮여 경계를 잃어버린다. 검붉은 길도, 어둔 밤도, 노란 가로등의 불도 무채색의 공간에 빠져들었다. 나는 거리감을 잃었고, 내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주변이 뭉개진 것을 확인했다.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나는 내가 아닌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조금도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멀미. 계속되는 멀미에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어지러움에 고개가 뒤로 꺾이고 눈앞에 주파수가 맞지 않는 풍경이 보인다. 노이로제, 길고 긴 노이로제, 아니 곡 하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짧은 노이로제, 아니-아니, 고개가 제대로 돌아오기 전이었으니 더 짧은 노이로제가 계속 되었다. 아- 아아으- 하는 소리가 났는데, 나는 그런 소리를 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눈이 감겼으나 내 의지로 감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감각이 개입했다. 내가 아닌 생각들, 이 쓸모도 없는 고민들이 나를 피카소의 그림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게르니카보다 더 비참한 죽음이 그려졌다. 내가 왜 발버둥 치듯이 산책을 나왔는지 떠올렸다. 그리고 회색 길의 끝이 회색 하늘에 닿았다. 나는 모든 고민을 신화에 내맡긴다.

물거품이다, 회색의 물거품이다.
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가로등이 제 빛을 되찾고 나는 자전거가 그려진 길을 본다. 뚜렷한 색들이 주변에 만연하다. 나는 다시 걷는다. 길의 끝이 신호등에 닿았다. 멈춘 곳 울타리 위에 붉게 핀 장미가 있다. 고개를 뒤로 꺾어 머리 위의 장미를 본다. 나는 회색과 물거품은 모두 잊고 붉은색에 빠졌다.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는다. 새벽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옷을 빨래 통에 던져두고 샤워를 했다. 일기를 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줄 사람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잠자코 봐줄 일기가 더 간절했다. 나는 나에게 중요한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으로 찍은 붉은 장미꽃 사진을 보았다. 회색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나를 좀먹을 뿐이라고, 고민들은 언제나 자라나지만 내가 키워줄 필요는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신경 발작 같은 건 일으키지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다음 날, 어렸을 때 다녔던 화실에 새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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