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0> 이승만
역사고백 <50> 이승만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19 20:09
  • 호수 14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에서 ‘권력의 화신’이 되기까지
▲ 1948년 대통령 취임사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

올해 역사전쟁을 치열하게 달구고 있는 ‘건국절’ 논란의 주인공이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친일독재자’, 분열과 분단을 부르는 ‘권력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비운의 정치가요. 내 전주이씨 양녕대군 16대손이긴 하지만, 사실상 몰락한 양반가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소. 두 살 때 서울 남대문으로 이사해 11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됨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소. 이곳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서구문물을 배우고 서재필 박사의 제자가 돼 독립협회에서 일하였소. 24세에 고종을 폐위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6년간 복역하였는데,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아 《독립정신》을 쓰게 되었소.


다행히 일본 하야시 공사의 도움을 받아 특사로 출옥하니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의 일이오. 그해 11월 미국으로 출국해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과 프리스턴대학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마치니 5년 반만의 초고속 과정이었소. 최소 12년 걸릴 박사학위 취득을 이리 빨리 마칠 수 있었던 건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지요. 허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전명운 지사의 변호를 내가 살인자란 이유로 거부하니 동포들의 실망이 크더이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일제가 신민회 사건을 만들어 동지 105명을 체포하기 시작했소. 난 두려워 친일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일본인 여권을 얻어 다시 미국으로 탈출하였소. 이후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이 항일군대를 양성하는 하와이로 갔는데, 내가 종교나 외교활동을 벌이자고 주장해 갈등이 커졌지요. 1919년 3월 만세운동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날 대통령으로 모시려 하였소. 허나 내가 프리스턴대학 스승이었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에 위임해달라는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하자, 박용만과 신채호 등이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며 크게 비난했지요.


그래도 1920년 12월 상해로 와 환영을 받으며 임정 대통령직을 맡았지만, 의견차가 심해 6개월만에 하와이로 돌아오고 말았소. 게다가 1925년 3월 날 대통령에서 탄핵시키니 관계도 단절되고 말았소. 고립무원 상태에서 다시 날 찾아준 건 1932년 국제연맹과 선을 닿으려는 김구 주석이었소.


난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 광복군에 대한 군사지원을 해주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소. 오히려 독선적으로 재미교포사회의 자금과 조직을 장악했다는 비판 탓에 임정의 소환요구까지 받았지요. 다행히 미국 군부와 매파 정치인들과 연계를 맺어 후원을 받을 수 있었소. 이런 인연으로 1945년 해방된 후 10월 도쿄에서 맥아더 최고사령관을 만났고, 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전용기를 타고 임정 요인보다 40여일 빨리 한국 땅을 밟아 혼란한 해방정국을 헤쳐 나갈 강력한 지도자라는 날개를 달게 되었지요.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물론 당시 서울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와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질문에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한 여운형과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나보다 앞섰지만, 마침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 우익의 대표로 부상하게 되었소. 특히 1946년 6월 통일정부가 여의치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정읍발언’으로 김구를 따돌리고 일약 아시아의 반공지도자로 자리를 굳혔지요. 남한단독정부 수립반대를 외치며 싸운 제주 4.3봉기나 여순반란사건을 겨우 진압하고 5.10총선거를 치르니, 결국 꿈에 그리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요. 그래도 난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년’을 명문화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히 하였소.


북에서는 9월 9일 또 다른 정권이 수립되었고, 남북한 모두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열망했지요. 허나 국내 정치기반이 부족했던 난 막강한 자본과 군사·정치·행정의 경험이 풍부한 친일파들을 우군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소. 가까스로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반대세력을 국가보안법으로 막아내며 김구세력도 제거했지만, 친일파 청산을 못하고 민족정기를 해쳤다는 비난은 두고두고 피할 수 없었소.


“아침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던 나의 바람은 북한의 남침으로 박살이 났고, ‘서울사수’를 방송했다가 대전으로 먼저 줄행랑친 것이 드러나 체면도 구겼지요. 또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니 지금도 자주국방에 먹칠을 하게 되었소. 허나 전쟁 와중에도 내 권력욕은 날로 왕성해졌으니 2대에 이어 유명한 ‘사사오입’ 계산법을 활용해 3대 대통령직을 거머쥐었소. 80세 생일엔 남산 등 전국에 내 만수무강을 비는 기념비가 세워지니 김일성이 부럽지 않았죠.


허나 네 번째 대통령직을 준비하던 1960년 측근들이 추진한 3.15 부정선거가 들통 나 전국에서 독재타도 함성이 치솟으니, 115명이 사망하는 사태로 번졌소. 결국 4.19혁명으로 내 눈물의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소. 내 90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외로이 세상을 뜨니, 과연 권력무상이더이다. 권력을 좇는 자 권력에 길들인 자여, 내 원죄를 똑똑히 기억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이며 단군성조와 열성조, 독립지사들을 욕되게 하는 망동은 자제해줄지어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